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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전쟁 이야기/십자군

베네치아 십자군

by 금곡동로사 2021.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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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베네치아의 모습

 

1122-24년 베네치아 십자군은 티레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 베네치아 공화국이 시작한 성지 원정이었다. 보두앵 2세 아래 예루살렘 왕국이 가장 큰 범위로 확장되는 시기의 초창기에 일어난 중요한 승리였다. 베네치아인은 티레에서 귀중한 무역상의 양보를 얻었다. 성지로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에 비잔틴 영토를 습격하면서 베네치아인은 비잔틴 제국과의 무역 특권을 확인하고 확장하도록 강요했다.

 

 

준비

 

보두앵 드 부르는 예루살렘 왕 보두앵 1세의 조카이자 1100년부터 1118년까지 에데사의 백작이었다. 1118년 그의 삼촌이 죽고 그는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가 되었다. 1119년 6월 28일 사르마다 근처에서 싸운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프랑크군(서유럽인을 지칭)은 마르딘의 통치자 일가지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그 해 말 보두앵은 어느 정도 영토를 되찾았으나 프랑크군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보두앵은 교황 갈리스투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은 그 요청을 베네치아에 전달했다.

 

십자군의 조건은 보두앵 2세의 사절단과 베네치아 총독 사이의 협상을 통해 합의되었다. 일단 베네치아인이 참여하기로 결정하자, 갈리스투스는 그의 승인을 나타내기 위해 교황의 깃발을 그들에게 보냈는데, 그는 라테란 제1차 공의회에서 베네치아인이 그들에 대한 면죄를 포함한 십자군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교회는 또한 십자군의 가족과 재산에 대한 보호를 확대했다.

 

1122년 베네치아 총독 도메니코 미키엘은 십자군의 해상수송을 시작했다. 1122년 8월 8일, 15,000명 이상의 병력을 태운 120척 이상의 배로 구성된 베네치아 함대가 베네치아 석호에서 출항했다. 그들은 당시 비잔틴 제국의 소유였던 코르푸에 투하되었고, 베네치아는 특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1123년 보두앵 2세는 알레포의 에미르인 마르딘의 발라크에게 붙잡혀 하르푸트에 수감되었다. 유스타스 그라베리우스가 예루살렘의 섭정이 되었다. 베네치아군은 이 소식을 듣고 코르푸 공방전을 포기하고 1123년 5월에 팔레스타인 해안에 도착했다.

 

베네치아 총독 도메니코 미키엘 / 현대 베네치아 석호의 모습 / 1000년경 베네치아의 영역(진홍색)
십자군 당시 수송에 사용된 함선의 모습과 해안 근처에서 공격하는 모습

 

야파 해전

 

베네치아 함대는 5월 말에 아코에 도착하여 에미르 발라크의 포위 공격을 돕기 위해 아스칼론을 향해 항해하는 약 백 척의 파티마 함대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그래서 베네치아 함대는 파티마 함대를 막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고 미키엘 총독은 우회하여 뒤를 치기 위해 함대를 둘로 나누도록 지시했다. 이집트군은 함정에 빠졌고 수적으로 많은 함대로 둘러싼 베네치아군은 손쉬운 승리를 거두었다. 파티마 함대의 제독을 포함하여 약 4,000명의 사라센인이 사망했고 9척의 선박을 나포한 베네치아군은 아코로 돌아오는 길에 10척의 상선을 나포했다. 샤르트르의 풀처와 티레의 윌리엄 모두 이 사건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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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레 공방전

 

1124년 2월 15일, 베네치아군과 프랑크군은 티레 공방전을 시작했다. 현재의 레바논에 있는 티레 항은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인 토흐테킨의 영토였다. 라틴 군대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베네치아 총독, 트리폴리의 백작 폰스, 왕국의 원수인 윌리엄 드 부리가 지휘했다.

 

베네치아군과 프랑크군는 도시 성벽을 부수기 위해 바위를 날릴 수 있는 투석기와 공성탑을 만들었다. 티레의 수비대도 투석기를 만들어 바위를 공성탑으로 날렸다. 공방전이 길어지자 시민들은 식량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긴급 구조 요청을 보냈다. 발라크는 만비즈를 포위하는 중에 사망했다. 토흐테킨은 티레로 진격했으나 트리폴리의 백작 폰스와 윌리엄 원수의 군대가 그를 맞닥뜨렸을 때 싸우지 않고 철수했다. 토흐테킨은 1124년 6월 평화협상을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다. 길고 어려운 논의 끝에, 항복 조건에 도시를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 가고,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집과 소유물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합의되었다. 이것은 도시를 약탈하고 싶어 하는 일부 십자군에게 인기가 없었다.

 

티레는 1124년 6월 29일에 항복했다. 티레의 윌리엄에 따르면 십자군이 도시로 진입한 후 "그들은 도시의 요새화, 건물의 강도, 거대한 성벽과 높은 탑, 접근하기 어려운 고귀한 항구에 감탄했다. 그들은 극심한 굶주림과 공급 부족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항복을 피할 수 있었던 시민들의 단호한 인내심에 대해 칭찬할 뿐이었다. 아군이 그곳을 점령했을 때, 도시에서 밀 다섯 자루만 발견했다."라고 말했다.

 

티레를 포위한 십자군과 베네치아 함대 / 만비즈 공방전, 발라크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 Estoire d' Eracles에서, 13세기
1100년경 레반트 지역

 

여파

 

보두앵 2세는 티레가 정복되는 동안 감금되었지만, 그 해 말에 석방되었다. 그는 즉시 석방 조건을 어겼다. 보두앵 2세는 베네치아인에게 티레의 광범위한 상업적 특권을 부여했고, 따라서 그들이 라틴 동부에 해군의 주둔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특권에는 난파당하거나 티레에서 사망한 베네치아인의 상속인에 대한 재산권 보장이 포함되었다.

 

티레를 떠난 많은 사람들이 다마스쿠스로 이주했다. 보두앵 2세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에 대한 적대행위를 재개했고, 두 지역으로부터 공물을 받았다. 보두앵 2세 아래 예루살렘 왕국은 가장 크게 성장했다. 티레는 예루살렘 왕국의 일부로서 번영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제3차 십자군 중에 사망했을 때 그는 티레 대성당에 묻혔다. 도시는 1291년 맘루크군에 의해 점령되고 파괴되었다.

 

베네치아 함대는 귀환 항해 중에 에게 해를 통과했다. 베네치아군은 다시 그리스 섬들을 약탈했다. 그리스인은 분쟁을 포기하고 베네치아의 상업적 특권을 확인해야만 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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