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타니아 또는 히스파니아 루시타나는 고대 이베리아 로마의 속주로, 오늘날 포르투갈(도루 강 이남)과 스페인의 일부(오늘날 엑스뜨레아두라 광역 자치주와 살라망카 주)였다. 그곳은 루시타니아인 또는 루시타니아 민족(인도 유럽어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주도는 에메리타 아우구스타(스페인 메리다)였으며,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기 전에 공화국 시절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속주의 일부였다. 로마인은 BC 2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이 지역에 왔다. BC 155년부터 139년까지 루시타니아 부족들과의 전쟁이 이어졌다. BC 27년에 속주가 만들어졌다.
루시타니아는 포르투갈의 대체 명칭으로 종종 사용되었다.
이름의 유래
루시타니아인(로마 속주에 이름을 부여한)의 이름의 어원은 아직 불명확하다. 대중적인 어원은 그 이름을 로마의 반신 루수스와 연결시킨 반면, 몇몇 초기 현대 학자들은 루스가 "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검증되지 않은) 어근 탄(tan-)이 뒤에 오는 켈트 루구스의 한 형태라고 주장했고, 다른 학자들은 그 이름을 아비에니우스의 오라 마리티마(AD 4세기)에서 언급된 고대인 루키스와 탄(이란어 스탄(-stan)) 또는 "지역" 또는 "물의 나라"를 암시하는 테인(tain)에서 유래한 말로, 이전에는 지역의 영주 또는 군주를 의미했던 어근이라고 주장했다.
대 플리니우스(자연사, 3.5)와 바로(BC 116-27년, 플리니우스가 인용)와 같은 고대 로마인은 플리니우스가 "이우숨 에님 리베리 파트리스 아우트 리삼 쿰 에오 바칸티움 노멘 데디세 루시타니아이 에트 파나 프라이펙툼 에이우스 우니베르사이"(루시타니아는 바쿠스와 그의 바칸테스의 리사와 관련된 루수스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판은 그 통치자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루시타니아라는 이름이 로마에서 유래했다고 추측했다.
루수스는 일반적으로 "게임" 또는 "놀이"로 번역되는 반면, 리사는 그리스어 Λύσσα, "광란" 또는 "분노"에서 차용된 것이며, 때로는 분노를 의인화하기도 한다. 후대의 시인들에게, 루수스와 리사는 바쿠스의 혈육 동반자(심지어 아이들)가 되었다. 루수스를 루시타니아의 창시자로 묘사한 루이스 바스 드 카몽이스의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Os Lusíadas, 1572년)는 당대 어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러한 생각을 확장한다.
고전 지리학자 스트라본(AD 24년 경 사망)은 그의 저서 '지리학(게오그라피카)'에서 "루시타니아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데 변화가 생겼다고 암시했다. 그는 도루 강 북쪽에 사는 한때 "루시타니아인"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가 살던 시대에 "칼라칸인"으로 불렸던 집단에 대해 언급했다.
루시타니아인
인도 유럽어 사용자였던 루시타니아인이 BC 6세기에 이 지역에 정착했지만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는 여전히 이들의 민족 형성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몇몇 현대 작가들은 그들을 문화적으로 그리고 아마도 결혼을 통해 켈트화 된 토착민으로 여긴다.
고고학자 스칼라트 람브리노는 루시타니아인이 이베리아 동쪽에 살던 루소네스족과 관련된 켈트계 부족 집단이라는 입장을 옹호했다. 일부는 두 부족이 스위스 산지에서 왔다고 주장해왔다. 다른 사람들은 그 증거가 루시타니아인이 이베리아 토착 부족임을 가리키며, 다른 지역 부족 간의 결혼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루시타니아인이 식민지로 삼은 첫 번째 지역은 아마도 두로 계곡과 오늘날 포르투갈의 베이라 알타 지역일 것이다. 베이라에서, 그들은 켈트족과 다른 부족들을 물리칠 때까지 머물렀으며, 로마인이 오기 이전에 엑스뜨레아두라에 이르는 영토까지 확장했다.
로마와의 전쟁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구스 북쪽의 민족 루시타니아는 이베리아 민족 중 가장 위대한 민족이자 로마인이 가장 오랫동안 전쟁을 벌였던 민족이다.
- 스트라본
루시타니아인은 리비우스의 로마사(BC 218년)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며 카르타고인을 위해 싸운 것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BC 194년에 로마에 맞서 싸운 것으로 보고되며, 때로는 켈티베리아 부족들과 동맹을 맺기도 한다.
BC 179년, 법무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는 루시타니아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지만, BC 155년에 처음에는 푸티쿠스(아마도 카르타고인)와 나중에는 카이사로스의 지휘에 따라 루시타니아인이 지브롤터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들은 집정관 루키우스 뭄미우스에게 패배했다.
BC 152년부터 로마 공화국은 특히 잔혹하다고 여겨지는 히스파니아 전쟁을 위한 병사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다. BC 150년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거짓 휴전 협정을 했다. 루시타니아인이 이 새로운 동맹을 축하하는 동안, 그는 그들을 학살하고 생존자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이는 비리아투스가 이끄는 새로운 반란으로 이어졌으며 그는 로마와 그들의 지역 동맹들을 상대로 많은 성과를 올린 게릴라 캠페인을 주도한 후, BC 139년에 로마인이 매수한 반역자들의 많은 시도 끝에 살해되었다. 2년 후, BC 137년에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는 루시타니아인에 대한 성공적인 캠페인을 이끌었고, 미뉴 강까지 북상했다.
로마인은 전직 집정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와 가이우스 마리우스(BC 113년 선출)와 함께 다른 승리를 거두었지만, 루시타니아인은 여전히 오랜 게릴라 전쟁으로 저항했다. 그들은 나중에 BC 80년 경 세르토리우스(변절한 로마의 장군)의 군에 합류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BC 61-60년에 그들에 대한 성공적인 원정을 수행했지만 아우구스투스 치세의 BC 28-24년 경까지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로마의 속주
아우구스투스의 분할 (BC 25-20)
루시타니아(그리고 아스투리아와 갈라이키아)와 함께 로마는 이베리아 반도 정복을 완료했고, BC 25-20년 또는 BC 16-13년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동부와 북부는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남서부는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서부는 루시타니아로 분할되었다. 원래 루시타니아는 아스투리아와 갈라이키아가 포함되었지만, 이들은 나중에 새로운 타라코넨시스 속주의 관할권에 할양되었고 처음의 분할은 루시타니아 에트 베토네스 속주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북쪽 경계는 두로 강을 따라 있었고 동쪽 경계는 살라만티카(살라망카)와 카이사로브라가(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를 지나 아나스(과디아나) 강까지 이어졌다.
BC 28년에서 24년 사이에 아우구스투스의 군사 캠페인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모든 히스파니아를 평정하였고, 북쪽으로는 아스투리카 아우구스타(아스토르가)와 브라카라 아우구스타(브라가), 남쪽으로는 에메리타 아우구스타(메리다)와 같은 로마 도시가 세워졌다.(레기오 V 알라우다이와 레기오 X 게미나 군단의 명예 전역자가 정착했다)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 시대 사이에, 속주는 세 개의 콘벤투스 이우리디쿠스로 나뉘었으며, 법정이 있는 수도(중심 도시)가 관장하는 영토 단위와 총독에게 조언한 로마/토착민 공동 집회(콘벤투스)였다.
에메리타 아우구스타(스페인 메리다)를 수도로 한 콘벤투스 에메리텐시스,
스칼라비스 이울리아(포르투갈 산타렝)를 수도로 한 콘벤투스 스칼라비타누스,
팍스 이울리아(포르투갈 베자)를 수도로 한 콘벤투스 파켄시스.
콘벤투스는 총 46개의 포풀리스를 지배했으며, 5개는 로마의 콜로니(에메리타 아우구스타(스페인 메리다), 팍스 이울리아(베자), 스칼라비스(산타렝), 노르바 카이사리나, 메텔리눔)였다. 펠리키타스 이울리아 올리시포(로마의 법률 자치체였던 리스본)과 다른 3개 도시 에보라, 미르틸리스 이울리아(메르톨라), 살라키아(알카세르 두 살)는 오래된 라틴지위를 가졌다. 나머지 37개는 스티펜디아리에 속했으며 그중에는 아이미니움(코임브라), 발사(타비라) 또는 미로브리가(상치아구두 카셍)가 있다. 다른 도시로는 오소노바(파루), 케토브리가(세투볼 트로이아), 콜리포(레이리아) 또는 아라브리(알렝케르)가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분할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에 루시타니아는 경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프라이세스가 통치했지만 나중에 집정관이 다스리게 되었다. 결국 298년에 다른 속주들과 통합되어 디오이케시스 히스파니아룸(히스파니아 관구)을 형성했다.
루시타니아 이름의 유산
많은 유럽 국가의 로마식 이름과 마찬가지로 루시타니아는 특히 격식적이거나 문학적이고 시적인 맥락에서 포르투갈의 대체 명칭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후대에 브라질이 되는 16세기 식민지는 처음에 "뉴 루시타니아"로 설립되었다. 흔히 사용되는 용어로는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루소포노스'(영어 루소폰)와 한때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으며 현재 독립한 나라들이 여전히 공통의 유산을 공유하고 있는 포르투갈 언어 국가 공동체를 가리키는 '루소포노'(영어 루시타닉)가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7년 침공 전에 프랑스의 손쉬운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 프랑스가 지원하는 북부 루시타니아 꼭두각시 왕국을 포르투갈의 후계국 중 하나로 세우자고 제안했다.
이 속주는 1915년 악명 높은 독일 유보트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한 북대서양 정기 여객선 RMS 루시타니아호의 이름이기도 했다. 선주 큐나드 라인은 보통 로마 속주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으며, 지브롤터 해협 북쪽에 있는 로마 이베리아 속주의 이름을 딴 루시타니아호와 함께 자매선인 RMS 마우레타니아호는 해협 남쪽에 있는 로마 북아프리카 속주의 이름을 따왔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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