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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중세로마

비잔틴 제국 역사 지도 - 1편 하나의 제국으로 남기까지

by 금곡동로사 2021.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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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395년 호노리우스의 서로마와 아르카디우스의 동로마로 갈라진 로마 제국

 

AD 395-408년 아르카디우스

아르카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테오도시우스 1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아일리아 플라킬라의 장남이며 호노리우스의 형제이다. 아르카디우스는 그들의 아버지가 사망한 395년부터 제국의 동쪽을 통치했고 호노리우스는 서쪽을 통치했다. 약한 통치자였던 그의 치세는 일련의 강력한 각료들과 그의 아내인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에 의해 지배되었다.

 

 

 

 

 

서부 제국의 섭정 스틸리코가 동부를 장악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진격하자 알라리크 역시 반란을 일으켰다. 396년 서고트족은 아테네와 펠레폰네소스에서 약 1년간 약탈을 하고 스틸리코가 보낸 군대를 격파하고 이동했다. 스틸리코는 서고트 출신의 가이나스를 보내 동로마의 섭정 루피누스를 제거했다. 이제 권력은 환관 에우트로피우스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397년 그는 알라리크를 일리리쿰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임명하고 스틸리코를 쫓아냈다. 398년 동부 제국은 서고트와 함께 훈족을 물리쳤다. 399년 에우트로피우스는 권좌에서 물러났고 동부 제국은 명목상 알라리크의 지역을 서부로 이전하며 서고트족은 서부 제국으로 향하게 된다.

 

 

AD 408-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일반적으로 소 테오도시우스로 불리며 401년에 태어나 유아였던 402년 아우구스투스로 선포되어 408년부터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치세는 테오도시우스 법전의 공포와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건설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또한 네스토리우스 주의와 에우티케스 주의라는 두 가지 큰 기독교 논쟁의 발발을 주관했다. 황제는 450년 7월 28일 말에서 낙상으로 사망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가 세운 콘스탄티노플 성벽.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성벽은 추가되고 보강되었지만 고대에 지어진 방어 시설 중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중세까지 난공불락으로 사산 제국, 이슬람 제국, 루스인, 불가르인으로부터 도시를 지켰다. 화약 대포가 등장하면서 약화되었지만, 당시 기술로는 한 번에 파괴되지 않아 재장전하는 동안 성벽을 수리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부분이 남아있고 1980년대부터 복구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5세기 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의 국경지대. 420년 기독교에 대한 페르시아의 박해로 사이가 악화되었고 동부 제국은 사산 왕조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은 훈족이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함에 따라 로마인이 평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때 우유부단한 교착상태로 종결되었다. 422년 별다른 변화 없이 화평이 이루어졌다.

 

아틸라의 훈 제국. 테오도시우스 2세 통치 초기 로마인은 훈족 내부의 불화를 이용하여 물리치고 요새를 강화했으며 424년에는 매년 350 파운드의 금을 지불하는 것에 합의했다. 433년 아틸라가 부상하면서 지불액은 두 배로 늘어 700 파운드가 되었다. 443년 훈족에 패배한 로마 제국은 매년 2,100 파운드(687 kg)의 금을 바치는 굴욕적인 양보를 대가로 물러가게 했다. 447년 훈족은 세르디카(소피아)를 파괴하고 콘스탄티노플 외곽에 이르렀다.

 

 

AD 450-457년 마르키아누스

마르키아누스는 황제가 되기 전 15년 동안 사령관 아르다부르와 그의 아들 아스파르 밑에서 일했던 도메스티쿠스(개인 조수)였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450년 7월 28일 테오도시우스 2세가 사망한 후, 군사력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아스파르가 마르키아누스를 황위 후보자로 지명했다. 한 달간의 협상 끝에 테오도시우스의 누이 풀케리아는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하기로 동의했다. 아스파르와 비슷한 영향력을 가진 군사 지도자 제노는 마르키아누스가 즉위하자 고위 궁정 칭호인 '파트리키'를 받았기 때문에 이 협상에 관여했을지도 모른다. 마르키아누스는 450년 8월 25일에 선출되어 취임했다. 마르키아누스는 동부 제국과 아틸라의 훈족과의 관계와 종교적 문제에 있어서 테오도시우스 2세의 많은 행적을 뒤집었다. 마르키아누스는 즉시 아틸라와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훈족에 대한 모든 금액 지급을 중단했다. 452년 아틸라가 당시 서부 제국의 이탈리아를 습격하는 동안, 마르키아누스는 다뉴브 강을 건너 헝가리 평야로 원정을 시작하여 그들의 중심부에서 훈족을 물리쳤다. 이 일과 이탈리아 북부에서 발생한 기근과 역병이 동반되어 서부 제국은 아틸라에게 뇌물을 주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 철수하도록 할 수 있었다. 453년 아틸라가 죽은 후, 마르키아누스는 로마 영토 내의 게르만 부족을 포이데라티(군사동맹)로 정착시킴으로써 훈족 연합의 분열로 인한 이점을 이용했다. 마르키아누스는 또한 예수가 신성과 인간의 두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 칼케돈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합성론자였던 시리아와 이집트의 민중은 새로운 공식 기독교론을 거부하고 소외되었다. 마르키아누스는 457년 1월 27일 사망하면서 동부 제국에 700만 솔리디(솔리두스의 복수형) 주화를 국고에 남겼는데, 이것은 훈족과 테오도시우스의 공물 지불로 인해 동부 제국에 가해진 경제적 파멸을 고려하면 인상적인 업적이었다. 그가 죽은 후, 아스파르는 마르키아누스의 사위 안테미우스를 제치고 군 사령관 레오 1세를 황제로 선출하여 맞이했다.

 

450년 지중해 세계.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이 우호적으로 나올 경우에만 돈을 지급하겠다고 선언했다. 아틸라는 격노했지만 계획대로 451년 서부 제국을 침공하여 카툴라우눔 전투에서 아에티우스의 연합군에 패배했다. 헝가리 평원으로 퇴각한 아틸라는 452년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아에티우스는 이미 군대를 해산하여 무방비 상태였다. 복수에 대한 열망과 약탈과 자원 수급은 훈족에게 동기 부여가 되어 길고 힘든 공성전 끝에 아퀼레이아를 점령하고 도시를 약탈했다. 로마 침공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사실 아틸라는 2년 동안 서부와 동부 제국으로부터 돈을 받지 못해 군자금이 심각하게 부족하고 지속된 전쟁으로 병력 손실이 많았다. 이탈리아에서 철수한 아틸라는 동부 제국을 위협했지만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에게 지급할 금으로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453년 아틸라가 죽은 후, 훈 제국은 동고트의 반란과 권력 다툼으로 급속히 무너졌다.

 

 

AD 457-474년 레오 1세

레오 1세는 트라키아 근처의 다키아 아우렐리아나 출신이었다. 때때로, 그는 레오 대제라고 불리며 아마도 그의 어린 손자이자 공동 아우구스투스인 레오 2세(그리스어 미크로스, "작은"이라는 의미)와 구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거의 20년 동안 동부 제국을 통치하면서 레오는 유능한 통치자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주로 흔들리는 서부 제국을 돕고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큰 야심 찬 정치와 군사 계획을 관장했다. 그는 후기 라틴어가 아닌 코이네 그리스어로 법을 제정한 최초의 동부 황제로 유명하다. 그는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기념되고 있으며, 축일은 1월 20일이다.

 

 

460년 서부 제국과 동부 제국. 레오 1세는 468년 반달족에 대한 원정으로 업적을 쌓으려 시도했지만 황제의 처남 바실리스쿠스의 오만함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프로코피우스는 이 원정의 비용을 13만 파운드의 금으로 추정하고 요안니스 리도스는 65,000 파운드의 금과 75만 파운드의 은으로 추정했다. 규모는 10만 명을 태운 1,113 척의 배로 구성되었고 그중 600 척의 배를 유실하였다. 이 패배 후 반달은 값비싼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그리스 해안을 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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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474년 1월 18일-11월 10일 레오 2세

레오 2세는 "젊은" 또는 "작은"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474년 6세 또는 7세의 어린 아이였을 때 잠시 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는 이사우리아 출신의 장군이자 미래의 황제인 제노와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1세의 딸 아리아드네의 아들이었다. 레오 2세는 473년 11월 17일 조부 레오 1세와 공동 황제가 되었고, 레오 1세가 이질로 사망한 후 474년 1월 18일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제노는 1월 29일 비잔틴 원로원에 의해 공동 황제가 되었고 그들은 레오 2세가 10개월 후 사망하기 전까지 짧은 기간 동안 공동 통치를 했다.

 

 

AD 474-491년 제노

플라비우스 제노는 474년부터 475년까지, 그리고 476년부터 491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국내의 반란과 종교적 불화가 그의 통치를 괴롭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외 문제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의 치세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의 퇴위와 율리우스 네포스의 사망에 따라 서로마 제국의 종말을 보았지만, 그는 동부 제국을 안정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AD 475년 1월 9일-476년 8월 바실리스쿠스

플라비우스 바실리스쿠스는 레오 가문의 일원으로 제노 황제가 반란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쫓겨났을 때 권력을 잡았다. 바실리스쿠스는 레오 1세 황제의 아내 아일리아 베리나 황후의 형제였다. 황제와의 관계는 그가 군사 경력을 추구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처음에는 사소한 성공들 후에, 468년에 고대 말기의 가장 큰 군사 작전 중 하나로 비참한 로마의 반달 아프리카 침공을 이끌며 끝이 났다. 바실리스쿠스는 475년 레오의 "야만인" 후계자 제노 황제의 인기 없는 평판과 제노를 콘스탄티노플에서 도피하게 만든 베리나가 조직한 음모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바실리스쿠스는 칼케돈 신앙에 반대하여 합성론 기독교적 입장을 장려하면서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의 근본적인 지지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또한, 주요 역할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을 임명하여 권력을 확보하려는 그의 정책은 그의 누이 베리나를 포함한 황실의 많은 중요한 인물들의 반감을 샀다. 그래서, 제노가 그의 제국을 되찾으려고 했을 때, 그는 사실상 아무런 저항도 없이 콘스탄티노플로 의기양양하게 들어갔으며 바실리스쿠스와 그의 가족을 사로잡아 죽였다.

 

 

AD 475년 1월 9일-476년 8월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마르쿠스 아우구스투스(476년/477년 사망)는 동로마의 장군이자 찬탈자인 바실리스쿠스와 제노니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475년에 카이사르로 칭송받았고, 후에 아우구스투스로 승격하여 그의 아버지와 공동 황제로 군림했다. 476년 8월 말 제노가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했을 때, 마르쿠스는 부모와 함께 교회로 피신했다. 제노는 그들의 피를 흘리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래서 그는 그들을 카파도키아의 림나이로 유배하여 그 후에 그들을 굶겨 죽였다.

 

 

바실리스쿠스와 제노의 투쟁은 476년 9월 초에 일어난 서부 제국의 몰락에 대한 동부 제국의 개입을 방해했다. 헤룰리 족장 오도아케르가 서부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폐위시키고 콘스탄티노플에 황제의 레갈리아를 보냈을 때, 제노는 막 그의 황위를 되찾았고 오도아케르를 이탈리아의 둑스로 임명하는 것 외에는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이로써 서부 제국은 몰락했다. 

 

 

AD 491-518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

아나스타시우스 1세 디코루스는 정부 행정관으로 경력을 쌓았다. 그는 그의 전임자인 제노의 부인에게 선택되어 61세의 나이에 황위에 올랐다. 그의 종교적 성향은 재위 기간 내내 긴장을 유발했다. 그의 통치는 비잔틴 제국의 정부, 경제, 관료주의의 개선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정부 부패의 최소화, 세법 개혁, 새로운 형태의 화폐 도입으로 2,300만 솔리디의 상당한 예산 흑자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7월 29일 시리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된다.

 

 

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의 국경지대, 387년 이후와 더 동쪽으로 진출한 591년 이후 경계가 함께 있다. 아나스타시우스 시대에 440년 이후 일어난 주요 분쟁으로 502-506년까지 벌어졌다. 502년 페르시아의 선제공격으로 국경의 많은 지역이 침범당했다. 503년 황제는 율리아누스 이후 최대 규모로 반격에 나섰다. 영토를 대부분 회복했지만 506년 코카서스에서 훈족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면서 화평이 체결되었다. 11월 조약이 합의되었지만 조약의 조건은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영토의 상실도 없었고 연간 지급액도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페르시아에 약간의 지불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518년 로마 제국의 모습. 서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로 동로마 제국이 아닌 로마 제국이었지만 후대에 비잔틴 제국으로 불리게 된다. 493년 동고트족이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오도아케르를 물리치고 자리를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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