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527년 유스티누스 1세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는 농가에서 태어나 군에서 승진하여 근위대장이 되었고, 아나스타시우스 황제가 사망하자 거의 70세가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그의 통치는 그의 저명한 조카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그 뒤를 잇는 세 명의 황제를 포함하는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를 설립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 그의 부인은 에우페미아 황후였다. 그는 강한 정통적 기독교 견해로 유명했다. 이로 인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 사이의 아카키우스 분열이 종식되었고 유스티누스와 교황 사이의 좋은 관계를 낳았다. 치세 내내 그는 관직의 종교적 성격을 강조했고 그 당시 비정통파라고 여겨졌던 여러 기독교 단체에 대한 칙령을 통과시켰다. 외교 문제에서 그는 종교를 국가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는 제국의 국경에 클리엔테스 국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고, 통치 말기까지 어떠한 중요한 전쟁도 피했다.
525년 동로마 제국. 유스티누스 황제의 치세 말년은 동고트와 사산 왕조와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526년 안티오키아가 지진으로 파괴되어 약 25만 명이 사망했다. 황제는 즉각적인 구호와 재건을 위해 자금을 지원했지만 528년 11월 또 다른 대지진으로 재건된 많은 건물이 다시 파괴되었고 훨씬 적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527-56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로도 알려진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는 야심 차지만 부분적으로 실현된 레노바티오 임페리 또는 "제국의 회복"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야망은 사라진 서로마 제국 영토의 부분적인 회복을 통해 표현되었다. 그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재빨리 정복했다. 그 후,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 그리고 다른 장군들은 동고트 왕국을 정복하여 반세기 이상 동고트족의 통치를 받은 달마티아, 시칠리아, 이탈리아, 로마를 제국으로 회복시켰다. 프라이펙투스 리베리우스는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을 회복하고 스페인 속주를 세웠다. 이 전역은 서부 지중해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여 제국의 연간 수입을 백만 솔리디 이상 증가시켰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의 치세에 이전에 로마의 통치를 받은 적이 없었던 흑해 동부 해안의 민족인 차니족도 정복했다. 그는 카바드 1세의 사산 제국과 교전했고, 후에 다시 호스로 1세의 사산 제국과도 싸웠으며 두 번째 분쟁은 부분적으로 그의 서쪽에서의 야망 때문에 시작되었다. 그의 유산의 여전히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측면은 코르푸스 유리스 키빌리스(로마법 대전)를 통일해서 고쳐 쓴 것인데, 이는 여전히 많은 현대 국가에서 민법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의 치세는 또한 비잔틴 문화의 꽃을 피우는 것을 의미했고, 그의 건축 계획은 하기아 소피아(오늘날 아야 소피아)와 같은 작품을 낳았다. 그는 동방 정교회에서 "성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라고 불린다. 그의 복원 활동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는 20세기 중반 역사학에서 "마지막 로마인"으로 알려져 왔다.
526년 비잔틴 제국으로 귀순한 사산 제국의 클리엔테스 국가인 이베리아 왕국(조지아 동부)을 놓고 전쟁이 벌어졌다. 조공과 향신료 무역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했으며 530년까지 페르시아 제국이 우위를 유지했다.
530년 다라에서 사산 제국의 4만 병력과 비잔틴 제국의 2만 5천 병력이 충돌했다. 사산 제국군에는 페르시아 만을 접하고 있는 아랍 왕국 라큼의 군대가 포함되었으며 비잔틴 제국군은 가산 왕국과 헤룰리족, 훈족 병력이 포함되었다. 전투 둘째 날, 1만 명의 페르시아군이 니시비스에서 도착했다. 페르시아의 첫 번째 물결은 비잔틴의 좌익을 향했다. 비잔틴 기병을 밀어냈지만 훈족이 투입되었고 대기 중이던 헤룰리족이 그들을 격퇴했다. 이후 페르시아군이 우익을 공격하여 비잔틴군을 밀어냈지만 벨리사리우스는 예비 병력인 부켈라리우스 기병으로 반격하여 페르시아군을 양분했다. 절반의 페르시아군이 갇혀 5천 명 이상이 전사했고 나머지 절반은 비잔틴 기병을 추격했지만 이 역시 격퇴되었다. 사탈라에서도 3만의 페르시아군이 절반이었던 비잔틴군에 깃발을 잃어버리고 패주하는 일이 있었다.
531년 4월, 사산 제국은 1만 5천의 아스와란 기병과 5천의 라큼 기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요새화 된 도시를 피해 원정 보냈다. 페르시아군이 칼리니쿰에 근접했을 때, 벨리사리우스가 그들을 향해 진군했다. 비잔틴군은 1만 5천의 보병과 기병, 5천의 가산 기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아마도 전투는 부활절 일요일에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에 낮부터 밤까지 금식해야 했고 병사들은 배고픈 상태였다. 페르시아의 지휘관 아자레테스는 기독교 군대의 금식을 예우하기 위해 전갈을 보냈고 벨리사리우스 역시 금식일 이후를 원했지만 연이은 승리에 비잔틴 군대는 전투를 원했다. 페르시아군은 좌익으로 기병을 더 보내 비잔틴의 우익을 공략했다. 가산 기병은 쉽게 퇴각했고 리카오니아 보병대의 측면이 노출되어 지휘관이 전사하고 패주했다.
이제 아스칸의 중기병이 노출되었고 약간의 전투 후 패배하여 지휘관이 전사했다. 강가로 몰린 비잔틴 보병대 풀콘(풀쿰)은 U자형으로 대형을 이뤄 강을 건너 킬리니쿰으로 퇴각할 때까지 버텼다. 페르시아 기병이 거듭해서 돌격했지만 사상자는 양측 모두 늘어났다. 벨리사리우스는 바로 전장을 이탈했다는 주장과 말에서 내려 보병대와 함께 싸웠다는 주장이 있다.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오리엔템에서 해임되어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었고 이듬해인 532년 두 제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콘스탄티노플 전차 경기장 히포드롬의 재건. 로마 시절의 4개 팀에서 줄어든 청색과 녹색의 2개 팀이 유지되고 있었다. 색깔이 다른만큼 지지층도 달랐는데 청색팀은 귀족과 대지주와 같은 상류층이, 녹색팀은 상인, 기술자와 같은 중류층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정책은 인기가 없었고 531년 경기 후 양측 세력이 충돌하여 군중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 처벌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532년 1월 13일 경주가 끝난 후 군중들 모두가 황제에게 "니카"(승리 또는 정복을 의미)를 외치며 5일간 궁전을 포위했다. 황제에 반대한 일부 원로원 의원이 아나스타시우스 황제의 조카 히파티우스를 새 황제로 선포하자 나르세스는 군중이 모여있는 히포드롬으로 가서 유스티니아누스는 청색당을 지지한다고 하며 그들에게 금을 분배하고 히파티우스가 녹색당임을 상기시켰다. 대부분의 청색당은 경기장을 빠져나갔고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가 이끄는 제국군이 남아있는 반란군을 학살했다. 기록에 따르면 약 3만 명의 폭도가 살해되고 폭동을 지지한 원로원 의원이 처형되고 추방되었다.
530년 카르타고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친로마 성향의 힐데리크가 쫓겨나고 사촌인 겔리메르가 대신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구실로 삼아 532년 사산조 페르시아와 조약을 체결하고 원정을 준비했다. 황제는 트리폴리타니아와 사르데냐에서 반란을 선동하고 겔리메르의 형제 차존이 이끄는 해군을 사르데냐로 보내게 하여 반달의 방위를 약화시켰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원정군이 533년 6월에 콘스탄티노플을 출항하여 9월 초 아프리카 해안의 카푸트 바다에 상륙하면서 겔리메르를 놀라게 했다.
비잔틴군 훈족 용병 600명과 기바문두스의 반달군 2천 명이 마주쳐 훈족이 승리하고 기바문두스와 겔리메르의 형제 암마투스가 전사했다. 솔로몬이라 불리는 지휘관이 이끄는 비잔틴 전위대와 겔리메르의 본대가 충돌하여 비잔틴군이 격퇴되었다. 겔리메르는 비잔틴군의 규모를 대군으로 생각하여 추격하지 않고 유리한 위치에 진영을 세워 사르데냐에서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벨리사리우스는 이틈을 타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12월, 차존의 군대와 합류한 겔리메르는 카르타고를 향해 진격하여 트리카마룸에서 비잔틴군과 전투를 벌였다. 비잔틴군이 승리하고 차존은 전사했으며 겔리메르는 산성으로 도주했다가 봄이 되자 항복했다.
535년 12월 말에 벨리사리우스는 시칠리아를 점령했다. 536년 문두스가 달마티아를 제압하여 살로나를 점령했지만 동코트의 대군이 도착하여 문두스의 아들 마우리키우스가 전사하고 문두스는 후퇴하면서 치명상을 입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일리리쿰으로 콘스탄티니아누스를 임명하여 달마티아를 신속하게 회복했다. 동고트의 장군 그리파스는 방어시설이 파괴되고 시민들이 친로마 성향으로 피난하면서 살로나를 포기했다. 콘스탄티니아누스는 도시를 점령하고 성벽을 재건했다. 536년 늦은 봄, 이탈리아로 건너간 벨리사리우스는 11월에 3주간의 포위 끝에 네아폴리스를 점령하고 도시를 약탈했다. 12월에 저항 없이 로마에 입성하자 동고트는 깜짝 놀랐고 라벤나에서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538년 나르세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아리미눔 구원을 주장하였고 요안네스의 편지에 도시로 진격했다. 포위를 우려한 동고트군이 철수하고 아리미눔에 비잔틴군이 무혈입성하면서 나르세스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538년 4월 메디올라눔에 1천 명의 군대를 보내자 동고트가 프랑크인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부르군트에서 1만 명의 군대가 알프스를 넘어왔다. 연합한 동고트는 메디올라눔을 포위하여 539년 3월 말에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하고 주민을 학살했다. 540년 5월 벨리사리우스의 군이 동고트의 수도 라벤나에 입성했으나 도시의 약탈은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전염병. 이 질병은 지중해 지역 전체, 유럽, 근동을 괴롭혔고 사산 제국과 비잔틴 제국, 특히 콘스탄티노플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궁정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그 역시 병에 걸렸다가 542년 회복했다고 하며 수도의 인구 약 1/5을 사망케 했다. 전염병은 541년 로마 이집트에 도착해 544년까지 지중해를 중심으로 퍼졌고 549년까지 북유럽과 아라비아 반도에서 지속되었다.
사산 제국의 호스로 1세가 평화 조약을 깨고 540년 봄에 로마 영토를 침공했다. 그는 베로이아를 약탈하고 안티오키아를 포위하고 흑해 연안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성 왕국 라지카를 공격했다. 541년 벨리사리우스가 오리엔트에 도착했지만 542년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었다. 전염병으로 543년은 소강상태로 지나갔으며 이듬해 호스로는 3만의 비잔틴군을 물리쳤지만 에데사 포위에 실패했다. 545년 남부 전선의 휴전이 합의되었고 북쪽의 라지카 전쟁은 557년까지 계속되었으며 562년 50년 평화 조약이 뒤따랐다. 조건은 로마로부터 매년 400 또는 500 파운드의 금(3만 솔리디)을 받는 대신 라지카를 양도하는 것에 동의했다.
벨리사리우스가 떠났지만 이탈리아 북부는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다. 비잔틴군의 기강해이와 약탈, 제국의 억압적인 재정 요구는 반기를 들게 만들었다. 동고트의 일디바드는 비탈리우스 장군을 물리쳤고 그들의 편에 섰던 오도아케르의 잔당인 루기족은 에라리크를 왕으로 선포했다. 541년 초가을 에라리크는 살해되고 동고트의 토틸라가 왕을 선포했다. 토틸라는 542년 발생한 전염병으로 로마 제국이 황폐화되고 인구가 감소한 가운데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면서 군대가 동부에 배치된 것과 이탈리아의 로마 장군들이 무능하고 분열된 점을 잘 이용했다. 551년 중반, 환관(쿠비쿨라리우스) 나르세스가 이탈리아 원정을 이끌게 되었다. 이듬해 봄, 육로로 안코나를 거쳐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로마로 진군했다. 타기나이 마을 부근에서 비잔틴군과 동고트군이 충돌하여 토틸라는 전사했다. 로마에 있던 동고트는 항복했고 나르세스는 553년 10월 몬스 락타리우스에서 마지막 동고트군을 물리쳤다.
히스파니아 서고트 왕국의 아길라 1세에 대항한 아타나길드의 요청에 552년 제국은 리베리우스가 이끄는 2천의 병력을 파견했다. 비잔틴군은 카르타헤나와 남동부 해안의 다른 도시를 점령하여 새로운 속주 스파니아를 세웠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에 발칸 반도는 다뉴브 강 북쪽의 이민족 침입으로 고통받았다. 황제는 주로 외교와 방어 활동을 병행했으며 559년 침공한 칸 자베르간이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지만 나이 든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격퇴했다. 정복 활동으로 부과된 중과세는 민중의 분노를 샀으며 그는 변화된 현실을 고려하지 못하고 제국의 자원을 위험하게 늘렸다.
565-578년 유스티누스 2세
유스티누스 2세 또는 소 유스티누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조카이자 테오도라 황후의 조카인 소피아의 남편이었고, 따라서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일원이었다. 그의 치세는 사산 제국과의 전쟁과 이탈리아 대부분 지역의 손실로 특징지어졌다. 그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유스티누스 2세의 십자가를 바쳤다.
575년 이탈리아. 텅 빈 국고를 물려받은 유스티누스 2세는 잠재적인 적에게 돈을 지불하던 관행을 중단했다. 즉위 직후, 558년부터 이어진 휴전을 끝내고 아바르족에 대한 지불금을 끊었다. 아바르의 압박에 랑고바르드족이 서쪽으로 이주하여 568년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몇 년 안에 거의 모든 지역을 차지했다.
생사를 수입하여 고급 직물을 제작해서 판매한 비잔틴 제국은 직접 비단 제품을 관리 생산했으며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수도사를 통해 중국에서 누에를 밀반입한 뒤로는 실크로드의 중요성이 낮아졌다. 비잔틴 실크는 화려한 색상, 금실 사용, 베틀로 짠 직물의 자수가 그림처럼 복잡한 디자인으로 주목할만했다.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은 568년 콘스탄티노플에 사절을 보내 비단 직거래와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동맹을 제안했다. 유스티누스 황제는 이에 동의하고 제국의 사절을 보내 소그드인이 원하는 비단 직거래를 보장했다.
578년 10월 5일-582년 8월 14일 티베리우스 2세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는 574년 유스티누스 2세가 정신 쇠약에 빠지기 전에 티베리우스를 카이사르로 선포하고 자신의 아들로 양자로 삼았을 때 권력을 잡았다. 578년 유스티누스 2세는 죽기 전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주었고 그는 582년 8월 14일 죽을 때까지 그 칭호를 유지했다.
582-602년 마우리키우스
저명한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사산 제국에 맞서 성공적으로 싸웠다. 황제가 된 후, 그는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치세에 남코카서스에 있는 제국의 동쪽 국경은 크게 확장되었고, 거의 2세기 만에 처음으로, 로마인은 더 이상 평화를 위해 페르시아인에게 매년 수천 파운드의 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마우리키우스는 발칸 반도에서 아바르족을 상대로 대대적인 작전을 펼쳤으며, 599년에는 그들을 다뉴브 강 너머로 후퇴시켰다. 그는 또한 2세기가 넘는 동안 처음으로 다뉴브 강을 가로질러 캠페인을 벌인 로마 황제였다. 서쪽에서, 그는 황제의 총독 또는 태수에 의해 통치되는 총독부(관할구)라고 불리는 두 개의 커다란 반 자치 지역을 세웠다. 584년 마우리키우스는 랑고바르드족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제국의 첫 번째 실질적인 노력으로 이탈리아 총독부를 세웠다. 591년 아프리카 총독부의 창설과 함께 그는 서부 지중해에서 콘스탄티노플의 힘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의 치세는 재정적인 어려움과 거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602년 불만을 품은 장군 포카스가 황위를 찬탈하면서 마우리키우스와 그의 여섯 아들을 처형했다. 이 사건은 제국의 재앙이 되었으며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26년간의 전쟁을 촉발시켜 이슬람 정복 이전에 두 제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의 치세는 특히 역사가 테오필락토스 시모카테스(라틴어 테오필락투스 시모카타)가 비교적 잘 기록한 고대 말의 시대이다. 천 년 이상 유럽과 중동의 군사 전통에 영향을 준 전법 스트라테기콘은 전통적으로 마우리키우스에 기인한다.
590-602년 테오도시우스
테오도시우스는 황제 마우리키우스의 장남으로, 590년부터 602년 11월 군사 반란으로 퇴위 및 처형될 때까지 공동 황제였다. 그의 장인 게르마누스와 함께, 그는 군대에 의해 마우리키우스의 후계자로 잠시 제안되었지만, 결국 군대는 포카스를 선호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에게서 원조를 확보하기 위해 보내졌지만 마우리키우스가 잡힌 며칠 후 포카스의 지지자들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처형에서 살아남았다는 소문이 퍼졌고, 테오도시우스라고 알려진 남자가 비잔틴과의 전쟁을 일으키려는 구실로 페르시아인에게 대접을 받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577년 마우리키우스는 군사 경력이 전혀 없었지만 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오리엔템으로 임명되었다. 578년 싱가라를 약탈한 그는 크테시폰 원정을 계획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클리엔테스 왕국인 가산 왕조와 불화가 생겨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582년 6월, 페르시아에 승리한 그는 8월에 재정적으로 파산하고 페르시아와 전쟁 중이며 아바르족에게 매년 8만 솔리디 금을 지불하고 발칸 반도의 속주는 슬라브족에게 완전히 파괴된 제국을 물려받았다. 전쟁은 계속되어 586년 다라 남쪽에서 승리했고 588년 말에는 마르티로폴리스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590년 호르미즈드 4세가 전복되고 그의 아들 호스로 2세가 즉위했지만 선황에게 반기를 든 바흐람 코빈에게 쫓겨나 비잔틴 궁정으로 도피했다. 마우리키우스는 35,000의 군대를 이끌고 호스로의 복권을 도왔다. 591년 바흐람 코빈의 군대를 물리치고 호스로는 황위를 다시 찾았으며 보상으로 아르메니아 서부 일대의 지역을 제국에 양도했다. 새로운 평화 조약은 수백만 솔리디의 지출을 줄이게 해 주었다.
568년 카르파티아 분지에 이른 아바르족은 시르미움을 공격하고 달마티아 속주를 침략하기 위해 코트리구르 훈족 1만 명을 보냈다. 매년 8만 솔리디의 금을 지불하게 되었고 579년 국고가 비면서 티베리우스 황제는 지불을 중단했다. 이에 아바르족이 시르미움을 공격해 581년 도시가 함락되었고 그들은 10만 솔리디를 요구했다. 제국이 거절하자 그들은 발칸 북부와 동부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슬라브족은 580년대에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여 펠레폰네소스까지 진출했다. 592년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아바르족에게서 싱기두눔을 탈환하고 593년 다뉴브 강 남쪽에 있는 슬라브족, 아바르족, 게피드족을 격파했다. 599년과 601년에 비잔틴군은 아바르족과 게피드족 사이에 대혼란을 일으키고 602년에는 슬라브족을 왈라키아에서 참패시켰다.
이탈리아 총독부의 관할권(적색). 584년 마우리키우스는 최고 행정관직인 프라이토리안 프라이펙투스와 군 통수권자인 마기스테르 밀리툼을 통합한 이탈리아 총독부를 세워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상당한 자치를 누리게 했다. 총독부는 이탈리아에서 랑고바르드의 진격을 늦추는 데 성공했다.
아프리카 총독부의 관할권(적색). 591년 비슷한 방식으로 아프리카 총독부를 창설했다. 597년 병든 황제가 작성한 유언장에는 아들들에게 분할 통치를 맡기려는 생각이 담겨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사두정치와 매우 흡사했다.
제국을 통합하려는 마우리키우스의 노력과는 반대로 재정 정책으로 인해 인기는 떨어졌다. 588년에 군사 임금을 1/4 삭감한다고 발표하자 페르시아 전선의 군대가 심각한 폭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599년 또는 600년에 아바르족에게 포로로 잡힌 12,000명의 비잔틴 병사의 몸값 지불을 거부하여 포로들은 살해되었다. 로마군 장교 포카스가 이끄는 군사 항의 대표단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굴욕과 거부를 당했다.
602-610년 포카스
플라비우스 포카스 아우구스투스의 초기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602년 마우리키우스 황제에 대항한 반란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포카스는 602년 11월 23일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마우리키우스를 타도했으며 같은 날 스스로 황제를 선포했다. 포카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엘리트를 깊이 불신했고, 따라서 그의 친척을 높은 군사 지위에 앉혀 반대자들을 잔인하게 숙청했다. 포카스는 폭군이자 찬탈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치세에 비잔틴 제국은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의 빈번한 발칸 반도 침입과 사산 왕조의 동부 속주 침공으로 다수의 적에게 위협을 받았다. 포카스의 무능과 잔혹함 때문에 아프리카의 총독 대 헤라클리우스가 포카스에 반기를 들었다. 610년 10월 5일 대 헤라클리우스의 아들 헤라클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같은 날 포카스를 처형하고 황제를 선포했다.
전임 황제와 그 가족들을 모두 처형했음에도 불구하고 포카스 황제의 자리는 불안정했으며 이는 그가 적을 숙청하고 음모를 부수는 데 에너지를 쏟도록 만들었다. 제국 전역에서 저항이 일어나 외적의 침입에 맞설 수 없었다.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발칸 지방의 수많은 침략을 감행했고 사산 제국도 동쪽 속주를 침공했다. 군대를 모두 동부 전선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에 발칸 지방의 도시에서는 학살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603년 페르시아의 침입이 시작되었고 607년까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보스포루스까지 소아시아의 많은 지역이 점령되었다. 610년 치세가 끝났을 때 페르시아는 이미 유프라테스를 건너 제노비아를 점령했다.
코메스 엑스쿠비토룸에 임명된 프리스쿠스는 608년 카르타고의 총독 대 헤라클리우스에게 포카스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호소했다. 대 헤라클리우스는 이에 동의하여 콘스탄티노플에 곡물 공급을 중단하고 큰 군대와 해군을 조직했다. 609년, 그는 사촌 니케타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육로로 군대를 진군했고 아들 헤라클리우스는 해군을 이끌고 테살로니키를 침공했다. 헤라클리우스는 610년 10월 3일 콘스탄티노플 외곽에 도착하여 10월 5일 도시를 점령했다. 그날 헤라클리우스는 황제로 선포되었고 포카스는 즉각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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