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술탄국의 붕괴 이후 생겨난 공국 중 하나로, 1299년 오스만 가지가 세운 오스만 제국은 1299년부터 1683년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오스만 제국의 처음 10명의 통치자는 가장 성공적인 술탄으로 여겨진다. 이 기사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지도와 함께 오스만 역사에 대한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오스만 통치자들은 술탄(아랍어 : 왕, 통치자), 파디샤(페르시아어 : 세계의 샤), 칸(터키어 : 중앙아시아의 선조들에서 나타남)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또한 시초의 두 통치자인 오스만 1세와 오르한은 당시 오스만 제국이 호전적인 공국에 불과했기 때문에 가지(전사)로 불렸다. 무라트 1세(1362-1389년)는 오스만 제국의 군대, 사회, 법률의 기초를 세운 최초의 술탄으로 여겨진다.
오스만 술탄들은 또한 셀림 1세(1512-1520년) 시대부터 칼리파(할리파)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칼리파는 이슬람식 칭호이며 이슬람 세계의 영적 지도자를 뜻한다. 이 종교적 칭호는 메카와 메디나를 정복한 후 오스만 술탄들이 사용했다.
1. 오스만 제국의 건국
오스만 제국의 건국은 오늘날 TV 시리즈의 주제이기도 한 에르투룰 가지 덕분에 일어났다. 아나톨리아 북서부 고원의 쇠위트와 도마니치에 정착한 오스만인은 매우 전략적인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 당시 아나톨리아에는 두 개의 지배적인 국가가 있었다. 하나는 서쪽의 비잔틴 제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셀주크 제국의 상속자인 동쪽의 룸 셀주크 술탄국이었다.
룸 셀주크 술탄국은 몽골의 서방 침략에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졌으며 아나톨리아에는 크고 작은 많은 공국들이 등장했다. 그들 중 하나인 중간 규모의 오스만은 비잔티움과 이웃하여 눈길을 끌었다.
오스만 제국이 건국된 이래, 그 목표는 항상 서쪽으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이즈니크(니카이아)와 부르사(프루사)와 같은 인접 도시들은 오스만 제국의 첫 번째 목표가 되었다.
2. 건국 술탄들의 제국
오스만 가지는 그의 아버지 에르투룰 가지로부터 전사 부족을 물려받았다. 군대를 창설하고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한 오스만은 오스만을 그 지역에서 떠오르는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오스만의 아들 오르한은 오스만 제국을 위해 획기적인 정복을 한 최초의 통치자가 되었다. 오르한은 이즈니크와 부르사 같은 두 개의 중요한 도시를 점령하고 부르사를 오스만 제국의 첫 번째 수도로 선포했다.
오스만 제국의 건국은 오스만의 치세인 1299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건국 술탄 중 세 번째 술탄인 무라트 1세는 오스만 제국을 실제 국가로 만들었다.
오스만 제국 최초의 포병 부대를 창설하고 예니체리 부대를 조직한 무라트 1세는 유럽 내륙으로 진격했다. 숙련된 지휘관이었던 무라트 1세는 전장에서 사망했다.
3. 시간 경과에 따른 오스만 제국 지도
위에 보이는 오스만 제국의 지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른 제국의 팽창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복은 오스만 제국이 부상하던 기간인 1299-1699년 사이에 400년 동안 일어났다. 쉴레이만 1세의 사후, 세월이 흐르면서 절정에 달했던 오스만 제국은 1700년대부터 수세기에 걸쳐 쇠퇴를 겪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도에서 볼 수 있는 성공적인 시기는 처음 10명의 술탄 치세에 일어났다. 이 술탄들은 각각 오스만 가지, 오르한 가지, 무라트 1세, 바예지드 1세(번개), 메흐메트 1세, 무라트 2세, 메흐메트 2세(정복자), 바예지드 2세, 셀림 1세(단호한), 쉴레이만 1세(장엄한)이다.
4. 오스만 정예 보병 - 예니체리
오스만 제국이 발흥하는 동안, 그 원동력은 정예 보병 부대였다. 예니체리라고 불리는 이 부대들은 발칸반도의 마을에서 모은 기독교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스탄불에 끌려와 군사훈련을 받은 이 아이들은 완전한 군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유망한 자들은 특별히 선발되어 톱카프 궁전에 있는 학교로 보내졌다.
엔데룬이라 불리는 제국 학교는 톱카프 궁전의 세 번째 뜰에 위치해 있었다. 술탄의 아들들과 함께 자란 이 아이들은 장래의 고위 관료가 되었다.
셀림 1세의 아들 쉴레이만은 이브라힘과 함께 엔데룬에서 자랐다. 쉴레이만이 "장엄한"이라고 불릴 만한 경력을 쌓고 있는 동안, 그 배후에는 대재상(사드르이 아잠) 이브라힘 파샤가 있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어린 시절 엔데룬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5.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후 제국으로 변모했다. 고대 말과 중세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이스탄불은 무역로의 교차로였다. 정복자 메흐메트 2세의 치세에 점령된 이스탄불은 부르사와 에디르네에 이어 오스만 제국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수도가 되었다.
위의 지도에서,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기 직전의 오스만 제국 경계를 볼 수 있다. 아주 오래된 비잔틴 제국은 붕괴 과정 속에 있었고 역사적인 반도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의 이스탄불 구시가지인 이 지역은 지도상으로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스탄불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기념물인 하기아 소피아, 톱카프 궁전, 쉴레마니예 모스크가 그곳에 위치해 있다.
6. 성지 점령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 부상한 오스만은 셀림 1세(1512-1520년)의 치세 동안 중동 전역으로 팽창했다. 셀림 1세는 8년 동안 술탄으로 지냈음에도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두 배로 늘렸다.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과 같은 성스러운 도시들은 그의 시대에 함락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보고를 금으로 채우고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 비옥한 땅을 정복한 셀림 1세(단호한)는 아들에게 큰 유산을 남겼다.
쉴레이만은 형제가 없는 드문 오스만 술탄 중 하나로 평화롭게 제위에 올랐다. 그는 인도로부터 향신료 루트, 중국으로부터 실크로드의 중심에 있는 제국을 물려받았다.
7. 쉴레이만 대제의 치세
쉴레이만 대제의 치세는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로 여겨진다. 1520-1566년 사이에 통치했던 쉴레이만은 진정으로 "찬란한" 시대를 살았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에는 미마르 시난과 같은 건축가와 피리 레이스, 오루츠 레이스, 바르바로스 하이레딘과 같은 제독들이 있었다. 오스만 이스탄불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갖추고 있으면서 동부 지중해에서는 우위를 점했다.
술탄 쉴레이만 시대는 세계사에서 영화의 소재가 된 서사시 시대였다. 이 기간 동안, 강력한 캐릭터들이 세계 최고의 제국을 통치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후에 엘리자베스 1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는 술탄 쉴레이만과 동시대 인물이었다.
8. 오스만 제국의 최대 영역 지도
술탄 쉴레이만 시대가 만든 기세는 그의 이후에도 이어졌다. 비록 그의 뒤를 이은 자들이 쉴레이만의 그늘에 남아있었지만, 제국은 처음의 10명의 술탄들이 세운 견고한 토대 위에서 계속 살았다.
오스만 제국의 지도는 제국이 가장 넓었던 17세기를 보여준다. 이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은 세 대륙에 걸쳐 퍼져나갔고 가장 큰 경계에 도달했다.
술탄 쉴레이만의 후계자 셀림 2세와 무라트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소쿨루 메흐메트 파샤와 같은 강력한 대재상들이 제국을 훌륭하게 다스렸다. 메흐메트 파샤는 쉴레이만의 말년에 취임하여 2대에 걸쳐 쉴레이만의 정신으로 국가를 통치하였다.
술탄 쉴레이만 이후 무라트 4세까지 7명의 술탄은 활동적인 전사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블루 모스크와 같은 건축 걸작들이 이스탄불에 세워졌다.
9. 발리드(왈리두흐) 술탄의 부상
술탄 쉴레이만의 아내 휘렘 술탄은 오스만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었다. 술탄의 어머니라는 칭호인 발리드 술탄의 지위는 쉴레이만 이후에 큰 힘을 얻었다.
이 시기에 살았던 누르바누 술탄, 사피예 술탄, 쾨셈 술탄, 투르한 술탄 등의 여성들은 아들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여성이 궁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 시기를 일부 사료에서는 여성 술탄국이라고도 한다.
술탄들이 국정운영에 관심이 적었던 이 시기에 발리드 술탄과 유능한 대재상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그리하여, 쉴레이만 시대의 성공은 계속되었다.
술탄들은 무라트 4세의 치세에 완전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전사 술탄인 무라트 4세 때 바그다드와 예레반이 정복되었고, 이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톱카프 궁전에 이들 도시의 이름을 딴 두 개의 정자가 세워졌다.
10. 제국의 개혁
유럽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 같은 발전은 오스만 제국에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1600년대와 1700년대에 오스만 제국은 많은 분야에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제국의 쇠퇴를 본 일부 술탄들은 개혁을 원했다. 그러나 제국의 개혁은 관료나 대중들로부터 충분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 오스만 2세, 아흐메트 3세, 셀림 3세와 같이 개혁을 원했던 술탄들은 반란으로 죽거나 폐위되었다.
과거에 매우 성공적이었던 예니체리 부대는 제국의 큰 문제로 변했다. 한 세기 이상 군사 개혁을 지연시킨 예니체리는 마침내 마흐무트 2세에 의해 제거되었다.
근대적 질서 속에서 군대를 창설한 마흐무트 2세는 사회생활에서도 중대한 개혁을 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1800년대 내내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하지만, 제국에는 지원할 경제력이 없었다.
11. 오스만 제국의 쇠퇴 지도
위의 지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볼 수 있다. 러시아, 오스트리아와의 끝없는 전쟁은 제국의 경제적 붕괴를 초래했다.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주의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 손실을 초래했다.
지도에서 주황색으로 표시된 땅은 1800년대에 사라졌다. 그중에서도 발칸반도와 이집트의 상실은 제국에 큰 피해를 입혔다. 특히 이집트의 상실은 오스만 제국의 무역로에 대한 지배력을 잃게 했다.
12. 오스만 제국의 멸망
제1차 세계대전은 오스만 제국의 몰락을 가져왔다. 독일, 오스트리아와 함께 전쟁에 뛰어든 오스만 제국은 재앙에 말려들었다.
오스만군은 갈리폴리 전역을 제외한 주요 전투에서 대패했다. 연합군은 수도 이스탄불을 점령하기 위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하려고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실패했다.
오스만군의 저항은 예상외로 차나칼레(일명 다르다넬스)에서 격렬했다. 방어 작전은 장래에 터키 공화국을 창설한 젊은 장군 무스타파 케말이 이끌었다.
13. 현대 터키의 건국
현대 터키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세워졌다. 하지만 물론 이것은 길고 어려운 과정의 결과였다.
1918년 군대가 해산되고 수도가 점령된 오스만 제국은 절망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성공한 장군들이 무스타파 케말 주위에 모였다.
무스타파 케말은 아나톨리아에서 해방군을 집결시켰다. 4년 가까이 지속된 투쟁 끝에 아나톨리아를 점령한 연합군이 패배했다.
1920년 전쟁 중에 설립된 국회는 전쟁이 끝난 후 유일한 권위가 되었다. 술탄국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4.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은 역사 내내 로마, 비잔틴,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전쟁은 앙카라에서 시작되었다.
터키 대국민의회가 앙카라에 설립되었을 때, 이스탄불은 연합군의 점령 하에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로 결정되었다.
이스탄불은 더 이상 수도가 아니지만, 여전히 터키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이다. 2,700년의 역사를 가진 이스탄불은 세계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도시 중 하나이다.
출처 : IstanbulC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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