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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고대 이야기/헬레니즘

펠로폰네소스 전쟁 - 거대한 전쟁 (BC 431-404년)

by 금곡동로사 2022.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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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일련의 분쟁이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 동맹 또는 연합을 맺어 동맹국들을 전쟁에 끌어들였기 때문에, 이들 전쟁은 그리스 세계의 대부분을 포함했다. 아테네의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편에서 싸운 전쟁의 주요 출처이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지휘관 중 하나였던 BC 422년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배척되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라는 책을 썼다. BC 431년에서 404년까지 갈등은 "대전"으로 알려진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리스인에게 "대전"은 그리스 세계의 많은 지역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인, 페르시아인, 시칠리아인도 포함하는 세계대전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양측이 모두 잔학행위를 저지르는 등 추악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에는 전쟁이 몇 시간밖에 지속되지 않았으며, 패배한 쪽은 존엄한 대우를 받았다. 패자는 쫓기거나 등을 찔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포로들은 예우를 받고 풀려났다. 투키디데스는 그의 역사에서 전쟁이 길어질수록 더 폭력적이고 덜 문명화된다고 경고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포로들은 쫓기고, 고문을 당했고, 구덩이에 던져져 갈증과 굶주림으로 인해 죽고, 바다에 던져져 익사했다. 무고한 어린 학생들이 살해되었고,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 자신들의 삶의 방식이 다른 세력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 전쟁은 매우 직접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아테네는 약 150개의 다른 도시국가들과 함께 페르시아의 침공 가능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델로스 동맹을 결성했다. 델로스 동맹 구성원 중 하나가 공격을 받으면 다른 동맹 구성원이 지원할 것이다. BC 466년 소아시아 연안의 에우리메돈에서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다. 델로스 동맹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너무 심하게 짓밟았기 때문에, 델로스 동맹의 일부 회원은 페르시아의 위협이 사라졌고, 동맹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에게 해의 몇몇 섬은 동맹을 탈퇴하고 싶어 했고, 더 이상 돈을 지불하거나 배를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아테네가 개입하여 이들 그리스인이 동맹을 떠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테네는 그들의 성벽을 허물고, 함대를 빼앗고, 동맹세를 계속 지불하라고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도시국가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델로스 동맹에 가입하는 것은 쉬웠으나, 탈퇴는 불가능했고, 동맹은 점점 아테네 제국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펜테콘타이티아 "50년의 기간"(투키디데스가 만든 단어)은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부터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의 기간이었다. 투키디데스는 이것이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불신의 시기였다고 말한다. 투키디데스는 이 시기 동안 아테네의 위대함이 스파르타에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한다. 그 발언에서 흥미로운 점은 역사상 처음으로 감정이 전쟁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두 도시국가 간의 불신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BC 465년에 큰 지진이 스파르타를 뒤흔들었다. 절망에 빠진 스파르타인은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테네인이 스파르타에 호플리테스를 보냈을 때, 스파르타인은 다시 생각해 보고 그들을 아테네로 돌려보냈다. 스파르타는 스스로 헤일로타이 반란을 진압했지만, 산꼭대기 요새의 높은 곳에서 헤일로타이 무리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스파르타인은 헤일로타이가 스파르타 영토 밖으로 이동하겠다고 약속하면 평화롭게 성채를 떠날 수 있도록 약속하는 협상이 타결되었다. 헤일로타이가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스파르타인은 아테네인이 이들 헤일로타이를 펠로폰네소스 바로 건너편 코린토스 만 연안의 아테네인이 장악한 항구도시 나우팍토스에 정착하도록 허용한 사실을 알고 놀랐다. 여기서, 헤일로타이는 만을 통제함으로써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에게 큰 해를 입힐 수 있었다.

아테네는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모든 것을 준비했다. 아테네는 에게 해를 장악했고, 델로스 동맹을 괴롭혀 동맹의 다른 두 도시국가만이 자체 해군을 보유하게 했다. BC 454-53년, 아테네는 델로스에서 아테네로 델로스 동맹의 금고를 옮겼고, 아크로폴리스에 새로 지은 파르테논의 뒤에 보관소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아테네는 "아테나에 기부"를 위해 동맹 자금의 60분의 1을 요구했는데, 이는 실제로 아테네로 직접 가는 동맹 구성원에 대한 세금을 의미했다. 아테네인은 스파르타의 전 펠로폰네소스 동맹 친구였던 메가라와 동맹을 맺는 등 육로로 주변을 동맹국으로 둘러쌌다. 아테네는 또한 바다를 지배했다.

 


대전 1단계 - 아르키다모스 전쟁 (BC 431-421년)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BC 432년에 결성되었다. 그 동맹의 도시국가인 코린토스는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통제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불평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전쟁을 하기로 결정했다. 페리클레스는 이 시점에서, 배척당하고 나중에 아테네로 돌아온 후 페르시아와 싸우다 죽은 키몬을 대신한 아테네의 명백한 지도자였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빠른 승리를 자신했다. 스파르타인과 그 동맹국들이 아테네 영토를 침공한다면, 아테네인은 장성 뒤에 숨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인이 공성전이나 성벽 파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파르타인은 아티카(아테네 영토)의 농지를 파괴할 수 있었지만, 곡물은 흑해에서 피레아스(페이라이에프스) 항으로, 그리고 아테네로 계속 흘러들어 가게 된다.

BC 431년,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는 아테네 영토를 침공했다. 스파르타인은 단지 몇 달 동안 머물며 올리브 나무를 베어내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돌아갔다. 그들은 BC 430년에 이를 반복했다. 같은 해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아테네 병사들을 칭송하는 유명한 "추도 연설"을 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삶의 방식이 스파르타의 삶의 방식보다 확실히 더 낫기 때문에 계속해서 아테네가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상대로 빠른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시골 지역을 습격한 지 몇 년 후에 스파르타인이 결국 장성에 좌절하여 아테네의 조건에 따라 평화에 동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아테네에 뭔가 끔찍하게 잘못되었다. BC 429년, 전염병이 아테네를 강타했다. 피레아스로 들어오는 곡식 중 일부가 오염되었고, 사람들은 거리에서 죽기 시작했다. 아티카의 모든 사람이 스파르타인을 두려워하며 비좁은 도시로 몰리면서 이제 아테네는 너무 혼잡했다. 질병은 빠르게 퍼졌고, 장성은 요새가 아니라 감옥이 되었다.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를 포함하여 약 30,000명의 아테네인이 사망했다. 투키디데스는 전염병에 걸렸지만 살아남았다. 스파르타인은 전염병에 걸릴까 우려하며 아티카를 재빨리 떠났다. 전쟁은 질질 끌었다.

BC 428년 아테네인은 오래된 도시 필로스를 점령함으로써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거점을 확보했다. 스파르타인이 도시를 되찾으려 했을 때, 400명의 스파르타 호플리테스는 근처의 스팍티리아 섬에 갇히게 되었다. 아테네인은 스파르타인을 굶주리게 하여 결국 항복하게 했고 120명의 스파르타 호플리테스를 아테네로 데려왔다. 그들은 이 스파르타 호플리테스를 인간 동물원에 전시했는데, 아테네인은 스파르타 호플리테스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이 전사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했고, 아테네와 타협할 의사가 있었다.

 


2단계 - 니키아스 화약과 시칠리아 원정 (BC 421-413년)

BC 421년,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50년 평화 조약을 체결했으며, 이 조약은 체결한 아테네인의 이름을 따서 니키아스 화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조건 중 하나는 사로잡힌 스파르타 호플리테스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껏해야 불안정한 평화였고, BC 420년 스파르타인은 올림픽 기간 동안 일리스로 호플리테스를 진군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스파르타는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이때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도시 중 일부는 스파르타에 반기를 들기로 결정했고, 스파르타의 오랜 적이었던 아르고스와 아테네의 도움을 받았다. BC 418년 펠로폰네소스 반도 만티네이아에서 대규모 지상전이 벌어졌다. 여기서 스파르타는 아르고스, 아테네 및 그들의 펠로폰네소스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들을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되돌렸다. 전쟁 동안, 아테네는 항상 바다에서는 이겼지만, 육지에서는 졌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테네를 고래에, 스파르타를 코끼리에 비유한다.

BC 416-413년 - 시칠리아 원정

시칠리아 섬은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800 마일 떨어져 있었다

 

BC 416년,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추종자인 젊은 아테네인 알키비아데스는 도시국가 시라쿠사를 공격하여 전쟁을 시칠리아에서 치르도록 아테네인을 설득했다. 시라쿠사는 코린토스의 식민지였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우호적이었다. 알키비아데스는 훌륭한 연설가였기 때문에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가 시라쿠사를 점령하면 시칠리아 전체가 무너지고 아테네에 새로운 부와 권력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파르타가 항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시칠리아는 아테네에서 800 마일 떨어져 있었고, 시라쿠사를 공격하려면 아테네 해군 선단이 필요했다.

원정대가 출항하기 전날 밤, 헤르메스의 신성한 조각상들이 파괴되었다. 알키비아데스와 그의 친구들이 술을 마시고 조각상을 부순 혐의를 받았다. 알키비아데스가 원정대의 리더였기 때문에 이는 난처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함대와 함께 출항할 수 있었지만, 함대가 이탈리아 남부 해안의 그리스 식민지인 투리이(Thurii)에 도착했을 때, 아테네에서 온 전령선이 함대를 따라잡았다. 이 작은 배는 알키비아데스가 조각상들을 부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알키비아데스를 아테네로 데려가기 위한 것이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알키비아데스는 애완견과 함께 배에서 뛰어내려 투리이까지 헤엄쳐 갔다.

니키아스는 아테네에서 반대하는 주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시라쿠사에 대한 공격을 지휘하게 되었다. 아테네 함대가 시라쿠사에 가까운 시칠리아에 상륙했을 때, 내키지 않는 니키아스는 그의 발을 질질 끌었다. 강력한 아테네 함대가 바다로 시라쿠사를 봉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인은 육지에서 시라쿠사를 봉쇄하는 데 필요한 성벽을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한편,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그는 스파르타인이 시라쿠사인을 돕도록 설득했다. 스파르타는 길리포스라는 이름의 지휘관과 함께 시라쿠사에 배 한 척을 보냈다. 길리포스는 시칠리아에서 군대를 일으켜 아테네를 물리쳤다. 어리석게도, 니키아스는 아테네에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새로운 병사들이 도착했을 때, 아테네인은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희귀한 월식 때문에 아테네 함대는 항구를 떠나지 못했고, 지체하는 동안 시라쿠사인은 항구를 가로질러 쇠사슬을 달아 아테네 함대를 가두었다. 아테네인은 육지로 도망쳤지만, 공격당해 죽거나 구덩이에 던져져 굶어 죽었다. 이상하게도, 시라쿠사인은 아테네의 극작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동경했고, 에우리피데스의 대사를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는 아테네 죄수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니키아스는 전사했고, 아테네는 함대의 대부분을 잃었다. 이것이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800 마일 떨어진 시칠리아섬에서 벌어진 시라쿠사 전투. 1) 그들을 맞기 위해 파견된 시라쿠사군을 물리쳤음에도 아테네 침공군은 도시를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2) 아테네군은 시라쿠사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두 개의 요새를 건설한다. 3) 아테네군은 포위망 구축에 실패하여 스파르타 길리포스의 시칠리아 상륙을 허용했다. 4) 길리포스는 라브달론 "스퀘어 요새"를 점령하고, 도시를 포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항 벽을 쌓았다. 5) 시라쿠사인은 항구를 가로질러 쇠사슬을 달아 아테네 함대를 함정에 빠뜨린다. 6) 아테네군은 육로로 탈출하려다가 베어지고 포로가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3단계 : 이오니아 전쟁 (BC 412-404년)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라, 스파르타인은 아티카에 영구적인 요새를 건설하여 일 년 내내 아테네 시골 지역을 파괴할 수 있었다. 이는 또한 은광에 대한 접근을 차단했고, 아테네인은 자원이 바닥났다. 알키비아데스는 그녀의 남편이 알키비아데스가 제안한 대로 일 년 내내 아테네 영토에 있는 동안 스파르타의 왕비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파르타 왕은 스파르타로 돌아왔지만, 알키비아데스가 이번에는 페르시아로 도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페르시아 제국에 살고 있는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가 함대를 얻는 데 사용했던 스파르타에 대한 지불을 늦추도록 리디아의 사트라프(총독)를 설득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이제 스파르타의 친구가 아니었고, 그는 페르시아 사트라프에게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계속 권력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결국 서로를 지치게 될 것이며, 페르시아가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확실히 열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알키비아데스가 페르시아에 끼친 영향을 보고, 아테네는 그가 돌아와 장군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아테네는 알키비아데스가 페르시아인이 아테네를 원조하도록 설득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델로스 동맹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아테네는 새로운 동맹국이 필요했다. 알키비아데스는 결국 영웅으로 환대받으며 아테네로 돌아왔다. 알키비아데스가 조각상을 부수었다는 이유로 제기한 혐의는 취하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비도스와 키지코스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아테네가 헬레스폰토스를 장악하게 했으나, BC 406년 노티움 해전에서 알키비아데스는 바다에 익숙했던 스파르타인 리산드로스에게 패했다.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로 소환되는 동안 이 스파르타 고래는 계속 유명해졌다. 알키비아데스는 재판을 받는 대신 은퇴했다.

BC 406년, 아테네인은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승리했지만, 함대의 지휘관들은 바다에서 선원들을 구출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아테네로 돌아와서 이 지휘관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이 결과에 항의했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가 군중 지배와 잘못된 의사 결정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팬이 아니었다.

마침내 BC 405년,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리산드로스는 헬레스폰토스에서 아테네 함대를 포획했다. 리산드로스는 그 후 아테네로 항해하여 피레아스 항을 봉쇄했다. 아테네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스파르타는 BC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했다.

회색 교차검은 스파르타의 승리를, 검은색 교차검은 아테네의 승리를 나타낸다.
폭발 아이콘: 델로스 동맹 구성원의 반란; 녹색: 중립 지역; 노란색: 페르시아 제국

 

스파르타의 조건은 관대했다. 첫째, 민주주의는 스파르타에 우호적인 아테네인 30명의 과두정으로 대체되었다. 델로스 동맹은 문을 닫았고, 아테네는 10척의 트리에레스로 줄어들었다. 마침내, 장성이 무너졌다. 4년 안에 아테네는 "30명의 참주"를 전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다. 스파르타에 패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사람을 찾던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재판에 회부했다. 그는 아테네 젊은이들의 마음을 타락시키고 신들을 믿지 않은 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컵으로 마시는 천천히 작용하는 독인 헴록(독당근)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 세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스파르타와 아테네 둘 다 약해졌다. 테바이는 BC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꺾고 가장 강력한 그리스 폴리스가 되었고, 그 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테바이와 그리스 동맹군을 물리치고 그리스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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