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노예제도는 로마 사회에서 매우 중요했고 노예들은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했다. 사회 밑바닥에 있더라도, 그들의 일상은 동질적이지 않았다. 로마 노예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의 고향에서 벗어나 뿔뿔이 흩어져 로마인 아래에서 순종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노동에 지친 죄수와 사슬에 매인 포로를 상상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주인에게 소중히 여겨진 노예들은 그들을 둘러싼 일부 자유 로마인보다 삶의 질이 더 높았다. 하지만 이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로마 노예의 대조적인 역할
로마 노예들, 세르비(servi, 노예를 지칭하는 세르부스/servus의 복수형)는 정복당한 부족들의 생존자이자 전쟁 포로였다. 죄수들과 해적들은 다른 이들처럼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노예들은 사거나 팔거나 고문하거나 죽일 수 있는 상품이었다. 로마법에서 그들은 레스 만키피/res mancipi(가이우스 인스티투티오네스 1.119-120, 사유 재산을 정의한 제도)로 여겨졌으며, 그들은 토지 및 커다란 짐승과 같은 가치 있는 상품의 범주에 속했다. 학문적 대화의 형태로 농업을 논의하는 서적인 레스 루스티카(Res Rustica)에서 M. 테렌티우스 바로는 노예를 인스트루멘툼 보칼레, 즉 "말하는 도구"로 정의했다.
로마의 대량 노예화 관습은 정복 및 영토 확장과 함께 왔다. 로마 공화정 말기에는 계속되는 해외 전쟁과 내전이 지중해 시장을 순환하는 노예 공급을 제공했다. 당시에는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로 사용되지 않았지만, 공화정이 종식된 후 노예의 다양성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소위 노예 사육과 함께 두 세기 동안 로마 노예들은 훨씬 큰 역할을 했고 그 수는 빠르게 증가했다. 예를 들어, 카르타고와의 세 번에 걸친 전쟁에서는 75,000명 이상의 포로가 붙잡혀 로마 노예로 팔렸다.
서로 다른 부족, 문화 및 배경에서 온 막대한 노예들의 유입은 세 번의 노예 반란을 촉발한 긴장으로 이어졌다. 세르부스 전쟁들은 진압되었고, 주요 노예 반란이자 로마 노예제도를 뒤흔든 유일한 경우였다. 영원히 알 수 없지만, 자유에 대한 열망에 이끌려 수많은 노예들이 한 용맹한 탈출 시도를 무시할 수 없다.
로마 노예 사이의 계층
일부 노예는 그들의 기술, 노고 또는 좋은 용모 덕분에 집단 내에서 상위 계층으로 오를 수 있었다. 그들은 다른 노예들을 부릴 수 있고, 더 빠르게 자유(해방)로울 수 있었다. 일부는 진정한 애정을 얻거나 주인과 관계를 시작할 수 있었다.
로마와 속주의 엘리트 가정에는 노예와 자유민을 막론하고 수많은 구성원이 있었다. 타키투스는 페다니우스에 있는 그의 집안에 400명의 노예가 있었다. 도시 행정관으로서, 이것은 상징적일 수 있지만 많은 수의 노예를 소유하는 것은 도시 지역에서 부와 사회적 중요성을 입증했다(타키투스 연대기 14.43). 하나 이상의 노예를 키우는 가정은 다른 혈통의 노예를 소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목표는 폭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동료 노예 간의 거래를 방지할 수 있었다. 가구당 많은 수의 노예로 인해 노예 계층이 분류되었다. 빌리키(vilici, 빌리쿠스/vilicus의 복수형)라고 불리는 호의와 신뢰를 받는 남성 노예들은 시골 영지에서 다른 노예들의 작업을 감독할 책임이 주어졌다.
다른 중요한 기능은 노예 교육자들이 맡았다. 이 교육자들은 남성이고 주인의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다. 그들은 다양한 기술을 가르쳐주고 스스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는 그들이 정교하고 지식이 풍부하며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비율이 더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로마 노예 공급의 또 다른 주요 원천은 기존 노예 인구 사이의 재생산이었다. 노예 여성의 자녀들은 모친으로부터 사회적 지위를 물려받았다. 베르나이(vernae, 베르나/verna의 복수형)라고 불린 이 노예들은 외국에서 온 포로 노예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주인에 의해 알려져 있었고 보살핌도 받았다. 그들은 법적으로 자유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특권을 누렸다. 가정에서 태어난 노예들은 더 편한 일자리를 얻었고 삶을 도시의 거주 구역에서 보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재단사나 음식 감별사로 일했고, 외국인 노예와 포로들은 검투사 양성소에 팔려가거나 속주 광산에서 사슬에 묶인 채 육체노동을 했다.
노예 여성의 삶
도시 지역의 노예 여성들은 그들의 여주인과 동행하고 목욕을 시키며, 미용사나 유모였다. 시골 지역에서는 부엌일을 하는 하녀, 빌리키의 아내나 하녀였다. 여성 노예의 사생활에 관해서는 동료 노예와 결혼하거나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정식 결혼인 코누비움은 금지되었지만 결혼과 유사한 불법적인 결합은 흔했다. 노예 자녀들은 주로 주인에게 속해 있었고, 종종 주인 자신의 친자식이었다. 이 로마 노예 자녀들은 주인의 적법하고 자유로우며 호의적인 자녀들과 함께 자랐다. 이는 로마 가족의 복잡한 역학을 입증한다. 로마의 여성 노예는 흔히 자식들과 떨어져 팔려가거나 주인의 자녀를 돌보라는 명을 받았으며, 이들이 남성 노예 교육자에게 인계될 때까지 보살폈다.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일부 로마 노예들은 주인에 의해 매춘부로 팔렸으며, 그는 노예들의 성적 및 물리적 학대로부터 금전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노예들은 그들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성적 만족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분명히 자신의 권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노예를 성적으로 이용하지 않은 것이 정신적 만족의 원천이었다(제1철학에 관한 성찰 I.17).
여성 노예는 또한 로마 종교 관습에도 존재했다. 첫째, 노예 여성들은 6월 11일 열리는 대중적인 여성 축제인 마트랄리아에 참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잔인한 예외는 의식 중에 노예 소녀는 의식에 따라 구타당하고, 자유인 집단으로부터 추방되었다. 두 번째 의식 관행은 그야말로 "노예 여성 축체"(안킬라룸페리아이)라고 불렸으며 역사적으로 매년 7월 7일에 기념되었다. 축제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4세기에 적으로부터 도시를 구한 노예 여성 집단을 기리는 것이었다. 여성 노예의 표현은 다양했다.
노예 시장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노예제도 자체가 인간관계의 불평등의 극치이다. 노예들이 목에 나무판을 걸고 반쯤 나체 상태로 서 있는 것은 로마의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모든 남성, 여성 또는 아이는 해당 노예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나무판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 나이, 기술 또는 기타 사양이 쓰였다. 노예를 팔 때, 법은 해당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중 하나는 노예의 수행 능력이 조금이라도 감소한 경우 판매자는 노예가 질병에 걸렸거나 어떤 식으로든 결함의 여부를 신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법학자들은 종종 노예의 수행 능력에 대한 의견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에 질병이나 결함이 있는지를 판결하고 결정할 필요가 있었다.
노예 가족은 개별적으로 팔렸고 노예 모친은 자녀들로부터 분리되었다. 이 행동은 노예제도 자체의 비극적 상황 외에도 극도로 심리적으로 무력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이 당신의 가격에 대해 입찰하고 흥정하는 로마 시장에 서도록 만드는 부족 또는 문화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노예의 목줄과 족쇄
들판이나 광산에서 일하던 로마 노예들은 가장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았다. 그들은 헛간 같은 구조물에서 잠을 자고, 먹을 것이 거의 없었으며, 발에는 무거운 짐이 될 뿐만 아니라 자유가 없는 운명을 상기시키는 사슬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일하는 소비재였다. 이 노예들은 탈출하는 것 외에는 자유를 얻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노예들은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이 본능이었고, 그것은 주인이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고된 육체노동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작업에서도 도망치는 이들은 매우 용감했다. 도망치는 노예가 발각되면 죽임을 당하거나 주인에게 돌려보내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가장 좋은 증거는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청동 태그가 부착된 유명한 철제 노예 목걸이이다. 태그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있다.
"나는 도망쳤습니다. 나를 잡아 주인 조니누스에게 데리고 가면 금화를 받게 될 것입니다."
로마 노예의 긴장과 삶의 스트레스는 주인이나 노예 모두에게 치명적으로 끝나는 많은 시나리오로 이어질 수 있다. 가장 좋은 사례는 아마도 오늘날 가장 유명한 로마 노예인 스파르타쿠스일 것이다. 소처럼, 그들은 종종 주인의 이름을 새긴 인장이나 문신을 이마에 새기는 경우가 많았다.
제국과 로마 노예제도의 붕괴
로마 제국이 노예로 운영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로마 사회경제 체제의 핵심 부분이었으며 로마 시민의 삶에 결정적인 요소였다. 로마의 노예제도는 잔인했다. 노예들은 짐승처럼 팔렸고 육체적, 성적으로 유린되었다. 그들은 극한 상황에서 일하고, 조롱을 당했으며, 끊임없이 열등감을 안고 살았다. 오늘날 우리는 로마군의 포로가 되어 시장에서 노예로, 아마도 영원히 팔리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갑자기 삶의 자유를 박탈당하거나, 가족에게서 떨어지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팔려가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로마의 노예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지 않았다. 제국이 쇠퇴하고 무너짐에 따라 노예제도는 약화되었고 고대 말기에는 새로운 노동 계층으로 변모했다.
출처 : The Coll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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