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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로마문명

로마의 기어 : 고대 로마 원로원 의원의 하루

by 금곡동로사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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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원로원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기관 중 하나였다. 원로원은 로마의 시초에 세워졌고, 로마 군주제의 몰락, 로마 공화정의 몰락, 제국의 분열, 그리고 476년 서로마 제국의 몰락에서도 살아남았다. 공화정 기간 동안 권력의 상승을 달성했고 중세 초기에 마침내 약화되었다. 이 글에서, 로마 공화정 시대로부터 원로원 의원의 삶에서 매혹적인 하루를 탐구할 것이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무엇을 했는가?

키케로가 카틸리나를 비난한다, 1889년 체사레 마카리 作, 출처 Wikimedia Commons


원로원은 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원로원이라는 단어가 라틴어(세넥스/Senex)로 "노인"을 의미하는 이유이다. 로마 원로원의 주요 기능은 법령을 논의하고 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는데, 모두 원로원의 콘술(집정관)이나 지도자들이 승인하거나 거부(라틴어 베토/Veto)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대외 정책을 결정하고, 경비를 관리하며, 종교 문제를 감독했다. 전쟁 문제에 있어서, 원로원은 전쟁에 필요한 병력의 수를 결정하고, 장군들을 통제하고, 그들에게 영예를 주었다. 어떤 문제에 대한 원로원의 최종 결정은 세나투스 콘술툼/Senatus Consultum으로 알려져 있었고, 모든 행정관은 이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들의 결정은 법령과 비슷했고 법과 비슷하게 기능했다.

귀족들은 어떻게 원로원 의원이 되었는가? 첫째, 그들은 선출된 것이 아니라 임명되었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대부분 동안, 선출된 관리인 켄소르(감찰관)가 새로운 원로원 의원들을 임명했다. 나중에 로마 제국 동안, 황제가 원로원 의원이 될 인선을 통제했다. 둘째로, 원로원 의원은 높은 도덕성을 지녀야 했다. 그들은 직업에 대한 보수를 제공받지 못했고 로마 국가를 운영하는데 자신의 재산을 써야 했기 때문에 부유해야 했다. 그들은 은행가나 상인과 같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어떤 범죄도 저지를 수 없었다.


로마 원로원의 간략한 역사

BC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지은 로마 원로원의 공식 회의 장소인 쿠리아 율리아, 이후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재건. 출처 the Colosseum


우리는 로마 원로원의 역사를 로마의 가장 초기 뿌리까지 추적할 수 있다. 영원한 도시가 세워지기 수세기 전, 이탈리아의 초기 인도유럽 정착민은 부족 공동체로 조직되었고 공통된 형태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요 겐스(씨족)의 파테르(가부장)들이 로마 원로원의 전신인 연합 장로회에 선출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의 초대 왕 로물루스는 1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을 만들었다.

초기 로마의 왕정 시대(BC 753-509년)에 원로원은 300명의 씨족/겐테스(Gentes, 겐스의 복수형) 지도자로 구성되었다. 초기 원로원은 콘실리움과 아욱토리타스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콘실리움은 로마 왕정 시대에 원로원이 로마 왕에게 자문을 제공하는 협의 기관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욱토리타스는 "권한"이라는 용어에서 유래했으며, 그것은 어떤 정치적 결정도 비준할 수 있는 원로원의 권리를 가리킨다.

로마 왕권이 몰락하고 로마 공화정(BC 509년경-27년)으로의 이행 이후, 원로원은 정치적으로 약했지만, 다양한 행정관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법치주의로의 전환이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고 여겨진다. 결과적으로 원로원은 몇 세대가 지난 후 공화정 중기에야 그 지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공화정 말기에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개혁 이후 다시 쇠퇴했다.

그라쿠스 기념비, 1853년 장 밥티스트 클로드 외젠 기욤 作, 출처 Web Gallery of Art


로마 공화정 동안 원로원은 300명의 행정관과 전직 행정관으로 구성되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고대 로마의 두 계급인 파트리키(귀족)와 플레브스(평민) 출신의 행정관을 뽑는 두 명의 켄소르에 의해 모집되었다. 첫 번째로 선택된 원로원 의원은 프린켑스 세나투스라는 칭호를 가졌다. 직함에 따라 비리 켄소리/viri censorii, 콘술라레스/consulares, 프라이토리/praetori 및 트리부니키/tribunicii 등 여러 범주의 원로원 의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비르 프라이토리우스/vir Praetorius는 이 직함을 가진 원로원 의원이 이전에 프라이토르(법무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의 속성인 콘실리움과 아욱토리타스는 공화정 기간 동안 변하지 않았다. 위기가 닥쳤을 때 원로원은 딕타토르(독재관)를 지명할 수도 있다.

원수정(BC 27-AD 284년) 동안 원로원은 더욱 쇠퇴하여 정치적 힘과 위신을 거의 상실했다. 마지막 일격은 개혁으로 원로원을 정치적으로 무의미하게 만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세에 발생했다.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정부 소재지가 옮겨진 후, 원로원은 시의 의회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만든 두 번째 원로원은 원로원의 운명을 더욱 확정했다. 마침내,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 동고트족의 통치(476-489년)와 짧은 기간 비잔틴 제국의 지배가 있었다. 원로원은 결국 603년 이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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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하루

보스코레알레에 있는 P. 판니우스 시니스토르의 빌라에서 쿠비쿨룸(침실), BC 50-40년경, 출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심할 여지없이,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공동체 내에서 높은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여러 영예와 특권을 누렸고 부유한 시민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가난한 시민들의 소박한 집에 비해 호화로운 가정에서 살았다.

원로원 의원과 그 가족 구성원들에게 하루는 일찍 시작되었다. 그는 보통 새벽에 일어났다. 그의 노예들은 훨씬 더 일찍 일어나 청소하고 먼지를 털고 닦았다. 잠에서 깬 후, 그와 그 아내가 옷을 차려입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맨 처음 입은 옷은 반소매 셔츠의 일종인 튜닉과 접어서 착용하는 커다란 직물인 토가였다. 신발은 현대 샌들과 매우 비슷하다. 원로원 의원으로서, 그는 공직의 상징으로서 토가 위에 라티클라베/laticlave를 입게 된다. 낮은 사회 계층의 튜닉에 착용하는 "좁은 줄무늬"(앙구스티클라비아/angusticlavia)와는 대조적으로 라티클라비아/Laticlavia는 "넓은 손톱" 또는 "넓은 줄무늬"를 의미한다.

옷을 입은 후 찬물로 손과 얼굴을 빠르게 씻었다. 다른 경우에는 원로원 의원이 개인 욕탕에서 목욕을 하곤 했다. 그의 아내도 똑같은 일상을 따를 것이다. 부유한 로마인 아내로서, 그녀는 전신 튜닉, 즉 스톨라/stola와 큰 숄을 입었다. 노예 여성은 그녀가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을 하고, 장신구를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곤 했다.

아침식사(젠타쿨룸/jentaculum)는 매우 일찍 먹었고 소금에 절인 빵, 우유 또는 와인, 그리고 아마도 말린 과일, 달걀, 꿀이나 치즈를 곁들인 밀 팬케이크와 같은 간단한 음식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항상 먹는 것은 아니거나, 물 한 잔과 빵 한 조각으로 단순화되었다. 음식은 노예들이 제공하거나 미리 조리되었다.


영원한 도시의 기어 작업

로마 원로원, 괴크벡 카야 作, 출처 Art Station


하루는 일과 여가로 나뉘었다. 대부분의 업무나 사업은 오전에 진행되었다. 로마인은 매일 새벽부터 정오까지 6시간을 일했다. 원로원 의원들의 일상적인 업무는 토론과 로마가 직면한 모든 종류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원로원 회의는 논의할 문제를 결정하고 토론을 진행하며 원로원 의원들의 결정을 돕는 행정관이 소집했다. 그들의 결정은 세나투스 콘술툼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론적으로는 전통적인 공식인 '시 에이스 비데비투르/si eis videbitur' 때문에 필수적이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말하자면, 원로원의 중요한 위치 때문에 그 결정은 필수적이었다.

앙투안 장 뒤클로스가 그린 원로원의 비난을 받은 세야누스, 출처 대영 박물관


이 회의에서 논의된 주제는 세금, 공공사업, 속주의 행정관 임명, 군사 작전이나 전쟁을 위한 병력의 수와 자금 지출, 외교 정책 관리, 영예 수여 등 로마 원로원의 다양한 권한 영역을 반영했다.

로마가 위협을 받으면 원로원은 딕타토르를 임명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이 할당받은 특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가진 특별한 행정관이었다. 그는 국가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특정 목적을 위해 다른 모든 행정관을 종속시켰고, 위기를 해결한 후 그 권한을 국가로 되돌렸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1619년 피터 폴 루벤스 作, 출처 라이덴 컬렉션


일이 끝나면 원로원 의원은 오락거리를 찾거나 집에 가게 된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게임(레슬링, 검투사 경기, 또는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경주)에 참석하거나, 극장에서 연극을 보거나 공중목욕탕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이 모든 장소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가 즐겼다. 로마식 점심(키부스 메리디아누스/cibus meridianus 또는 프란디움/prandium)은 정오 무렵에 먹는 빠르고 가벼운 식사였으며, 소금에 절인 빵에 과일, 샐러드, 달걀, 육류 또는 생선, 채소, 치즈와 같은 추가 재료를 곁들였다.


로마 원로원 의원의 하루 일과의 끝

로마의 만찬, 로베르토 봄피아니(1821-1908) 作, 출처 J. 폴 게티 박물관


업무와 여가를 마친 후 저녁식사가 제공되었다. 저녁식사(케나/cena)는 그날의 주요 식사를 대표하며, 물을 탄 와인이 포함된다. 원로원 의원은 고기(생선, 염소 또는 쇠고기), 채소, 달걀, 과일이 포함된 상류층 저녁식사를 즐겼다. 그는 식욕을 돋우기 위한 가벼운 요리(계란, 생선, 익힌 채소 및 생야채)로 시작했다. 그런 다음 그는 다양한 소스와 채소를 곁들인 다양한 고기 요리가 제공되는 메인 코스로 왔다. 마지막으로 과일, 견과류, 치즈, 그리고 달콤한 요리로 구성된 디저트가 나왔다. 식사 후, 저녁식사는 코미사티오/Comissatio로 알려진 와인의 마지막 서빙으로 마무리되었다.

 

 

 

출처 : The Coll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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