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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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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쿠스 막시무스와 셉티조디움 셉티조디움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궁전의 웅장한 측면을 완성하고 싶어 하던 시기에 지어졌다. 이 건물은 당시 알려진 7개의 행성(태양, 수성, 금성, 달, 화성, 목성, 토성)을 나타냈기 때문에 셉티조디움이라고 불렸다. 확실히 아피아 가도를 타고 로마에 온 방문객들은 황제의 궁전과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모퉁이에 셉티조디움이 나타나면서 장대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사진 중앙에 있는 팔라티노의 전체 경관. 왼쪽에는 벨라브룸, 배경에 로마의 포룸이, 오른쪽 하단에는 대 키르쿠스(키르쿠스 막시무스)가 있다. 250,000석을 수용할 수 있는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의심할 여지없이 로마와 심지어 제국에서도 가장 컸다. 앞쪽에 있는 카르케레스는 트랙을 7바퀴 도는 경주의 출발 신호를 제공하는 데 사용되었다. 사진 상단.. 2021. 4. 26.
팔라티노 언덕 팔라티노 언덕은 공화정 시절 고위층인 키케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그리파, 그리고 훗날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인 옥타비아누스를 위한 단순한 주거지역이었다. 제국 지배하에, 그것은 간단히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는 광대한 궁전으로 더 부유해졌다. 사진의 왼쪽에는 티베리우스 궁전, 중앙에는 거대한 정사각형 구조를 형성한 도무스 플라비아와 도무스 아우구스타나, 오른쪽 위에는 스타디움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궁전이 있다. 멀리서 본 이 경관은 팔라티노의 궁전이 거대한 건축물이 되었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며, 건물들이 서로 붙어있어 건축 전체가 계획된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더 가까이에서 본 궁전의 중심부에 있는 도무스 플라비아와 함께 훌륭한 페리스타일(주랑 현관의 일종)과 연못이 보인.. 2021. 4. 25.
아벤티노 아래 평지와 테스타치오 언덕 사진 아래쪽에는 아벤티노 아래 평지와 테스타케우스 언덕의 일반적인 모습이 나타나 있다. 왼쪽 하단에는 오스티아 항으로 흘러가는 테베레 강의 굽은 부분이 있다. 아벤티노 평지에는 창고와 인슐라이, 저택이 밀집해 있었다. 데키우스 목욕탕을 돌아 아벤티노 언덕은 평지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사진의 중앙에서 언덕 꼭대기와 평지를 연결하는 길고 완만한 경사로의 비쿠스 플라타노니스와 아벤티노의 서쪽을 따라 이어지는 비쿠스 아밀루스트리를 짐작할 수 있다. 멋진 장소였기 때문에 장엄한 도무스(귀족이 살던 집)가 이 특별한 매력적인 지역에 지어졌다. 목욕탕과 스티뮬라의 신성한 나무(a) 가까이에 플라비우스 이울리우스 콰르투스의 저택(b)이 있었고, 파크투메이의 저택(c)은 진정한 궁전이었으며 확실히 평지 전체를 내.. 2021. 4. 24.
수라 목욕탕 (테르마이 수라나이) 아벤티노의 비탈에 있는 리키니우스 수라 목욕탕의 정원이 지금은 로마의 대 키르쿠스가 있는, 당시 마르키아 계곡을 향해 돌출되어 있었다. 클리부스 푸블리키우스에 위치한 수라 목욕탕. 보르툼누스 신전은 수라 목욕탕 가까이에 있었다. 보르툼누스는 계절의 신이었다. 사원은 BC 264년에 지어졌을지도 모른다. 보르툼누스 신전 산책로 앞의 콘수스 원형 신전. 북서쪽에서 본 보르툼누스 신전과 콘수스 신전. 출처 : maquettes-historiques 2021. 4. 23.
피스키나 푸블리카 사진 중앙에 카라칼라 목욕탕과 아피아와 마르키아 수도교 사이에 아우구스투스의 행정 구역 XII가 펼쳐져 있다. 이 지역은 피스키나 푸블리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과거에 로마의 젊은이들이 수영을 배우던 공공 수영장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아벤티노 기슭에 있는 거대한 저수지로, 사람들과 말을 씻는 물을 담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그 장소에 대한 식별은 BC 215년까지 올라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영장이 사라져도 이름은 남아 있었다. 계획에 따르면 저수지는 Q. 아이아키우스 켄소리누스의 저택이 위치한 곳에 있었어야 했는데, 더 아래에 위치했다. 소 아벤티노의 꼭대기에서 포르타 나이비아를 출발점으로 하여, 노바 가도에 도달하기 위해 지역을 가로질러 내려가는 클리부스 델피니를 따랐다. 비쿠스 포르.. 2021. 4. 22.
소 아벤티노 사진에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 건설되기 이전에도 아벤티노의 양쪽 봉우리를 모두 포함했던 옛 세르비우스 성벽을 볼 수 있으며 이 사진에는 하드리아누스의 사저가 세워진 융기된 장소가 보인다. 전경에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 있다. "하드리아누스의 사저"(프리바타 하드리아니)으로 알려진 이 멋진 건물은 소 아벤티노의 남쪽 지대에 여러 층으로 지어졌으며, 분명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저택보다 정원이 있는 궁전으로 여겨질 수 있다. 건축가 황제는 이 저택을 로마의 사저로 짓도록 내버려 두었을지 모르지만, 확실히 그 집에서 거주한 시간은 많지 않다. 사진 왼쪽에 있는 코르니피키아 저택. 이곳은 M. 우미디우스 콰드라투스와 결혼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여동생의 집일 수도 있다. 이 집은 하드리아누스의 사저처럼 아벤티노에.. 2021. 4. 21.
아벤티노 언덕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아벤티노 언덕(몬스 아벤티누스), Regio XIII은 높이가 아주 낮았다. 언덕은 실제로 작은 협곡이 공유하는 두 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첫 번째 봉우리는 테베레 강에 가깝고 두 번째 봉우리인 소 아벤티노(그리고 피스키나 푸블리카라고 불리는 로마의 Regio XII에 속하는 일부)는 더 남쪽에 있다. 공화국 동안에는 항상 인기 있는 지역이었으며 제국 시대에 더 많은 주거 지역이 되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은 라틴인의 연방 성소가 된 다이아나 사원을 지었다. 또 다른 오래된 종교 건물인 미네르바 사원도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데키우스 목욕탕 외에도 트라야누스 황제의 친구 중 한 명이 사설 목욕탕인 수라 목욕탕을 지었다. 아벤티노에서 가장 큰 건축물인 데키우스 목욕탕.. 2021. 4. 20.
카피톨리움/카피톨리노 언덕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카피톨리노(이탈리아어: 캄피돌리오, 라틴어: 몬스 카피톨리누스), REGIO VIII은 로마의 종교적 중심지였다. 사진의 중앙에 있는 주요 사원은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 또는 최고신 유피테르의 사원이다. 여러 번 불에 타고 항상 같은 장소에 재건되었다. 이곳은 로마의 정치적, 종교적 상징이었다. 몇몇 도시들도 자신들만의 카피톨리노를 가지고 있었다. 이 언덕은 두 개의 봉우리, 오른쪽 아르스(Arx)와 앞쪽에 있는 카피톨리눔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 아래쪽에 있는 가파른 지형은 타르페이안 바위와 100 계단이다. 이 바위 꼭대기에서 반역자들이 던져졌다. 제국이 끝날 무렵, 이곳은 성역과 기념물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다. 언덕이 끝나는 북서쪽 끝에서 쇠퇴한 로마 포룸이 전경에 보인다.. 2021. 4. 19.
라티나 가도(Via Latina) 비아 라티나(라틴어 "라틴 길"의 의미)는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약 200 km에 이르는 이탈리아의 로마 도로였다. 경로 길은 로마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포르타 라티나에서 알기다스 산의 길로 이어졌다. 도로는 로마의 초창기 군사 역사에서 중요했다. 캄파니아로 가는 경로로 아피아 가도보다 앞서 존재했으며 BC 334년 칼레스에 라틴식민지가 세워지고 로마에서 도로로 접근할 수 있었던 반면 아피아 가도는 22년 후에 만들어졌다. 또한 직선처럼 곧은 아피아 가도가 극복해야 했던 공학적인 어려움 없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병참선을 따른다. 노선으로서, 라비카나 가도보다 앞섰지만, 라비카나는 나중에 선호되었을 수 있다. 교차점 이후, 라티나 가도는 트레루스(사코) 계곡을 따라 나폴리로 가는 현대 철도 노선을 따라 헤르.. 2021. 4. 18.
파리 공성전 (885-886년) 이 사건을 목격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아보에 따르면 885년 가을 어느 날 고성능 선박 700 척과 아주 많은 작은 선박들이 강 하류 2 리그[10 km 또는 6 마일] 이상까지 뻗어 있는 기둥처럼 센 강을 감쌌다. 젊은 베네딕도회 수도승은 또한 이 선박들을 조종하는 '음산한 자들'이 4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아마도 바이킹의 맹공 중 가장 야심 찬 침공이었던 885-6년 파리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센 강을 거슬러 올라간 바이킹 군대는 앨프레드의 방어책에 의해 잉글랜드에서 쫓겨난 소위 대군세의 다양한 요소들과 플랑드르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다른 습격자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탄한 아보가 그의 라틴어 서사시 "벨라 파리시아카이 우르비스"(파리시 전쟁)에서 전한 숫자는 200여 명의 방어.. 2021. 4. 17.
스쿠너(Schooner) 스쿠너는 범장에 의해 정의되는 범선의 한 종류이다. 2개 이상의 돛대가 종범장(세로 돛)이며, 돛대가 2개인 스쿠너의 경우 앞 돛대는 일반적으로 주 돛대보다 짧다. 일반적인 변형인 톱 세일 스쿠너는 또한 앞 돛대 상단에 가로 돛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위에 돛을 추가할 수 있다. 다른 정의는 앞에 가로 돛을 추가하면 그러한 선박을 브리간틴으로 할지 여부가 불확실하게 남는다. 많은 스쿠너가 개프 범장을 하고 있지만, 다른 예로는 버뮤다 범장과 스테이 세일 스쿠너가 있다. 스쿠너 범장 선박의 기원은 불명확하지만, 네덜란드 해양 예술가들이 그린 그림에는 17세기 초의 좋은 증거가 있다. "스쿠너"라는 이름은 1700년대 초 북아메리카 동부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름은 물을 건너뛰거나 돌을 건너뛰는 것을 의미하는 .. 2021. 4. 16.
아피아 가도(Via Appia) 아피아 가도(라틴어 및 이탈리아어: 비아 아피아)는 고대 공화국에서 가장 빠르고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로마의 도로 중 하나이다. 길은 로마와 이탈리아 남동부의 브린디시를 연결했다. 그 중요성은 스타티우스가 기록한 일반 이름으로 표시된다. 「 아피아 롱가룸··· 레기나 비아룸 "기다란 길의 여왕 아피아 가도" 」 이 도로의 이름은 BC 312년 삼니움 전쟁 동안 남쪽으로 가는 군사도로로 첫 구간을 완공한 로마의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태생 도로의 필요성 아피아 가도는 BC 312년에 그 목적을 위해 건설된 이래 군사 지원의 주요 경로로 사용된 로마 도로였다. 아피아 가도는 로마 지역 바깥으로 (로마인에게 필수적인) 군대를 수송하기 위해 특별히 건설된 최초의 긴 도.. 2021. 4. 14.
전열함(Ship of the line) 전열함은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돛의 시대에 건조된 전함의 일종이다. 전열함은 전열로 알려진 해군 전술에 맞게 설계되었으며, 전열은 옆면을 따라 대포를 발사하기 위해 기동하여 상대하는 전함의 두열에 의존했다. 서로의 전열함들이 함선의 측면으로부터 발사하게 하는 충돌에서, 더 많은 포를 발사하고, 더 많은 화력을 가진 함선이 일반적으로 유리했다. 이러한 교전은 거의 변함없이 가장 강력한 함포를 더 많이 탑재한 가장 중무장한 함선들에 의해 승리되었기 때문에, 당대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한 범선을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1840년대 말부터 증기 동력의 도입으로 전장에서 바람에 덜 의존하게 되었고, 증기로 추진하는 전열함이 건조되면서 돛으로만 움직이던 선박을 대체하게 되었다. 그러나, 철갑.. 2021. 4. 13.
바이킹의 침략 - 아일랜드 아일랜드는 선사시대부터 침략을 받은 적이 없다. 8세기 말에 상당히 갑작스럽게 도착한 바이킹은 3세기 이상 되는 기간을 기독교가 거의 방해 없이 조직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예술적 보물을 키워온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 온 뱃사람들의 약탈은 파멸과 혼란을 가져왔지만, 그들은 또한 최초의 도시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이후의 아일랜드 역사에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바이킹은 그들이 습격하고 교역하는 멀리 떨어진 대륙과 이 섬을 하나로 묶어 최초의 대규모 외부 접촉과 상업 생활의 시작을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 이전의 전임자들처럼, 그들 역시 원주민과 동화되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아일랜드 언어와 아일랜드 풍습을 채택하는 아일랜드의 인구통계학적 패턴을 따랐다. 처음에는 해안과 강변 정착지의.. 2021. 4. 12.
항해자 히밀코(Himilco the Navigator) 히밀코는 BC 6세기 말 또는 5세기 초에 카르타고가 인근 지역을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에 살았던 카르타고의 항해자이자 탐험가다. 히밀코는 지중해에서 유럽의 북서부 해안에 도달한 최초의 탐험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모험담은 로마 작가들에 의해 인용된다. 히밀코의 항해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은 로마의 학자 대 플리니우스가 자연사(2.169a)에서 간단히 언급한 것이다. 히밀코는 AD 4세기에 지리에 대한 시적 서술인 Ora Maritima를 쓴 루푸스 페스투스 아비에누스에 의해 세 차례 인용되었다. 히밀코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히밀코는 대서양 연안을 따라 이베리아 반도에서 브리튼 제도까지 북쪽으로 항해했다. 그는 주석(청동 제조에 사용) 및 다른 귀금속을 거래하기 위해 프랑스 북서부와 .. 2021.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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