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728x90

고대사137

파르티아 - 로마에 필적하는 잊혀진 제국 BC 53년, 로마 군단은 카르헤 전투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오랜 전쟁이 뒤따랐지만, 로마는 그들의 숙적인 파르티아를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절정기에 파르티아 제국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히말라야 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실크로드를 장악함으로써 파르티아는 부유해졌고, 관용적인 통치자들이 아케메네스 제국의 위대함을 되살리고 다문화주의를 모방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막대한 부는 수세기 동안 전장을 지배한 최첨단 군대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 후 독특한 반전으로, 로마 군단에게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로 판명된 이 강력하고 부유한 제국은 역사에서 거의 완전히 지워졌다. 그것은 영원한 라이벌에게 붕괴된 것이 아니라 본거지에 훨씬 가까운 적, 즉 신흥 세력인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몰락.. 2022. 12. 14.
그리스 박트리아 - 알려진 세계의 끝에 있는 왕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은 실로 광범위했고, 지중해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 그리스 사람들과 문화를 가져왔다. BC 323년까지, 그의 제국은 그리스의 대부분뿐만 아니라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까지 포함했으며 멀리 인도 가장자리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제국은 오래가지 못했고, 그가 사망하자, 라이벌 계승자인 디아도코이에 의해 분열되었다. 헬레니즘 시대(BC 323-31년)의 그리스 세계는 갑자기 훨씬 더 커졌으며, 이전과는 달리 훨씬 더 다양해진 문화적 변화 및 혼합의 시기는 그리스인들이 서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깊숙이 도래하면서 야기되었다. 이 영역의 가장 동쪽 경계에 있는 멀리 떨어진 지역이자 고립된 전초기지인 박트리아는 독특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통치하게 된다. 그리스인과 박트리아 왕.. 2022. 12. 12.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계승자들(디아도코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디아도코이 시대는 그리스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페이지 중 하나였다. 일련의 야심 찬 장군들은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일부를 확보하려고 시도했고, 이는 헬레니즘 세계를 형성한 왕국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음모, 배신, 그리고 유혈의 시기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 : 긴장이 고조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BC 323년 6월 11일 아마도 장티푸스로 바빌론에서 사망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알렉산드로스는 장군들로부터 그가 죽은 후에 누구에게 그의 제국이 갈 것인지 질문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최후의 힘을 다해 "가장 강한 자에게"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을 남겼다. 이 거대한 제국은 아드리아 해에서 인더스 강까지, 그리고 리비아에서 오.. 2022. 12. 11.
아케메네스 제국의 위대한 적들 2세기가 넘는 정복 기간 동안, 아케메네스 제국은 여러 유명한 적과 싸웠다.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부터 토미리스 여왕과 같은 스키타이 통치자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는 격렬한 적수들과 충돌했다. 그 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동안, 유명한 레오니다스와 같은 왕에서 밀티아데스 및 테미스토클레스와 같은 장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적들이 나타났다.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등장으로 한때 강력했던 제국이 폐허가 될 때까지 이 치명적인 적들과 싸웠다. 9. 아스티아게스 : 아케메네스 제국의 첫 번째 적 아케메네스 제국이 시작되기 전에 페르시아는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의 속국이었다. 키루스 대왕이 아스티아게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은 메디아 제국으로부터 페르시아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아스티아게스.. 2022. 12. 9.
페르시아 제국의 9대 도시 페르시아 제국은 전성기에 동쪽의 힌두쿠시에서 서쪽의 소아시아 해안까지 뻗어 있었다. 이 거대한 영토 안에서, 아케메네스 제국은 사트라피라고 불리는 여러 지방으로 나뉘었다. 이 지방들은 중동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들의 본거지였다. 파사르가다이 및 페르세폴리스와 같은 왕도에서 수사나 바빌론과 같은 행정 중심지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는 중요한 도시들을 장악했다. 여기서 아케메네스 시대의 이 도시들의 역사와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다룰 것이다. 다음은 페르시아 제국의 가장 위대한 9대 도시이다. 1. 파사르가다이 - 페르시아 제국의 첫 번째 대도시 BC 550년 키루스 대왕이 반란을 일으켜 메디아를 격파한 후, 그는 페르시아를 지배적인 강대국으로 세우기 시작했다. 그의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키루스는 왕에게.. 2022. 12. 6.
크세르크세스 1세의 생애와 통치 그리스 정복에 실패한 것으로 가장 유명한 크세르크세스 왕은 아마도 가장 악명 높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왕 중 하나일 것이다. 크세르크세스 1세는 가혹한 처벌, 계집질, 페르시아 제국의 국고를 고갈시킨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페르세폴리스에 어마어마한 궁전과 기타 프로젝트를 지었고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다. 여기 크세르크세스 왕의 생애와 통치에 관한 9가지 사실이 있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즉위를 했다 BC 486년 다리우스 대왕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는 가문의 장남이 아니었다. 그의 이복형제 아르타바제네스는 다리우스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태어났다. 처음에 아르타바제네스는 왕의 역할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 2022. 12. 3.
다리우스 대왕 - 만왕의 왕 강력한 지도자이자 행정의 천재인 다리우스 대왕은 전성기의 아케메네스 제국을 다스렸다. 서방의 발칸반도에서 동방의 인더스 강 유역까지 뻗어있는 페르시아는 고대 세계에 등장한 가장 큰 제국이었다. 다리우스는 거대한 궁전을 짓고 인상적인 왕의 길을 건설한 강력한 문명의 건축가였다. 그는 경제 혁명을 일으켰고, 통화를 통일했으며, 제국 전역의 도량형을 측정하고, 법률 시스템을 개편했다. 이 빛나는 왕 중의 왕에 대한 9가지 사실이 있다. 9. 다리우스 대왕의 자랑스러운 왕실 유산 다리우스 대왕은 히스타스페스의 장남으로 BC 550년에 태어났다. 장군이자 왕실의 일원인 히스타스페스는 키루스 대왕과 그의 아들 캄비세스 치하에서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이기도 했다. 다리우스는 전설에 따르면, BC 530년 사망하기 직전에.. 2022. 12. 2.
키루스 대왕 - 매혹적인 사실과 업적 키루스 대왕(BC 600년-530년경)은 종종 최초의 페르시아 제국으로 언급되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창시자였다. 그가 죽었을 때, 그는 지중해에서 인더스 강까지 뻗어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키루스 대왕은 종교, 인권, 철학, 문학의 영역에 끼친 그의 영향력으로도 기억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광대한 제국이 관리되는 안정적인 정치 체제를 만들었다. 키루스 대왕 : 사실과 허구 키루스의 이름과 칭호를, 그가 이 땅에 평화를 수립했다는 진술을 제공하는 바빌로니아 명문이 새겨진 구운 점토 벽돌, BC 6세기 우르, 대영 박물관 그러한 위상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키루스 대왕의 생애를 둘러싼 많은 신화와 전설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사실이 허구보다 더 낯설다. 키루스의 생애를 묘사하는.. 2022. 12. 1.
로마 제국 - 야만인의 침공 제국의 서부가 약화되다 서로마 제국은 더 약하고 가난한 절반이었다. 410년, 알라리크와 야만인 집단 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했다. 로마가 외국 군대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보다 800년 앞선 초기 공화정 시대의 갈리아인 이래 처음이었다. 국경을 지킬 수 없게 된 서로마 제국은 많은 야만인에게 짓밟혔다. 451년, 아마 모든 야만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훈족의 아틸라는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에서 벌어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로마군과 서고트족에게 패했다. 대부분의 야만인이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훈족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야만인 집단 중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카탈라우눔의 로마군 지도자는 아틸라의 어린 시절 친구인 아이티우스였다. 아이티우스는 어린 시절의 일부를 훈족의 야만적인 진영에서 인질로 지내며 보.. 2022. 11. 29.
로마 제국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황제가 되었다. 그는 로마가 필요로 하는 것, 안정과 내전의 종식, 실업자들을 위한 일자리를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주었고, 그는 어떤 왕이나 독재자 못지않게 강력했지만, 원로원이 로마 제국의 많은 부분을 통치하도록 허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나는 로마를 벽돌의 도시로 발견하고 대리석의 도시로 남겼다"라고 말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를 재건하고 미화하여 많은 실직 로마인들을 그 과정에서 일하게 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대제국을 통치했다. 그가 이 거대한 제국을 통해 이룬 평화는 무역과 번영의 증가로 이어졌다. 그는 라틴어와 로마 문화를 전파했다. 제국 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아우.. 2022. 11. 28.
로마 공화정의 종식 -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그들이 로마 공화국을 구했기를 희망했다. 3월 15일, 그들은 카이사르의 절친한 친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도 죽이는 것을 고려했지만, 그를 위협으로 보지도 않았고 도살자로 등장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목표는 카이사르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제 안토니우스는 기회를 보아 로마의 군중에게 카이사르의 예복을 보여주며, 각각의 단검이 찌른 곳을 드러냈다. 카이사르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를 죽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도주했다. 놀랍게도 카이사르의 종손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재산 대부분을 물려받았다. 당시 19세였던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재산을 주장하기 위해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항해했다. 아무도, 특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를 권력을 장악할 위협으로 보지 않.. 2022. 11. 27.
로마 공화정 후기 그라쿠스 형제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병사들이 타국 전쟁에서 돌아와 그들이 떠나 있는 동안 농장이 부유한 로마인들에게 팔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더 이상 농장을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판매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인 것 같았다. 새로운 소유주들은 이 작은 농장들을 합쳐서 노예들이 일하는 "대농장"을 만들었다. 그래서 병사들이 그들의 땅을 잃을 정도로 나쁘지만 않다면, 새로운 소유주들은 그들이 땅을 경작한다고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수천 명에 달하는 실직 퇴역 병사들이 일자리를 찾아 로마 거리로 몰려들었다. 한때 자랑스러웠던 로마인의 대부분은 이제 정부의 지원금으로 존재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부유한 평민이었다. 티베리우스는 무엇보다도 오래.. 2022. 11. 26.
제3차 포에니 전쟁 (BC 149-146) 대 카토. 그는 그리스 문화를 경멸했고, 카르타고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한 후 그렇게 잘 해낸 것에 화가 났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했다.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의 작은 지역으로 축소되었고, 반면 로마는 카르타고의 많은 영토, 특히 이베리아(스페인)를 차지함으로써 확장되었다. 이제 로마는 역사상 처음으로 병사들이 오랫동안 전장으로 멀리 나가 있어야 했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카르타고와의 평화가 이루어진 지금, 고국으로 돌아가는 이 병사들은 어떻게 되는가? 대부분은 농부였지만, 그들이 없는 동안 부유한 로마인들은 농장을 사들이고 노예를 이용하여 농장을 운영했다. 돌아온 참전용사들은 갈 곳도 일거리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아 로마로 몰려들었다. 이는 로마의 "승리를 거둔.. 2022. 11. 25.
제2차 포에니 전쟁 (BC 218-201) 용병 전쟁 (BC 240-237년) 카르타고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에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용병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했다. 로마는 전쟁 후 카르타고에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강요했고, 그래서 카르타고는 용병들에게 지불할 돈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용병들과 카르타고 사이의 지불에 대한 의견 불일치는 용병 전쟁으로 이어졌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위대한 카르타고 지도자인 하밀카르 바르카는 이제 아프리카로 돌아와 시칠리아에서 로마에 맞서 싸운 자신의 군대 일부였던 용병들과 싸웠다. 하밀카르는 성공했지만, 카르타고가 용병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로마는 코르시카 섬과 사르데냐 섬을 장악할 기회를 잡았다. 이는 카르타고의 주요 무역로 중 일부를 차단했고, 카르타고는 제국에 추가할 새로운 땅을 찾아야 했다. .. 2022. 11. 24.
제1차 포에니 전쟁 (BC 264-241)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분쟁이었다. 이는 BC 264년에 시작되어 241년까지 끝나지 않은 긴 전쟁이었다. 분쟁의 대부분은 시칠리아 섬이나 시칠리아를 둘러싼 바다에서 일어났다. 한때 로마는 카르타고와 매우 가까운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영토를 공격했다. 이 원정은 크산티포스라는 스파르타인이 카르타고 군대를 이끌고 그들의 조국을 방어했기 때문에 성공적이지 못했다. 카르타고는 원래 BC 800년경 페니키아인에 의해 정착되었다. 페니키아의 도시국가인 티레 출신의 디도 공주는 북아프리카 해안에 이 도시를 세웠다. 페니키아인은 주로 유리, 상아 조각품, 그리고 그들의 유명한 자주색 옷을 거래하는 위대한 선원이자 무역상이었다. 포에니("페니키아인, 티레의 보라색/진홍색"을 뜻하는 그리스어 '포이니키.. 2022. 11. 23.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