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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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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역사19

로마인이 수도교를 건축한 방법 로마 수도교는 고대 세계의 가장 훌륭한 유산 중 하나이다. 한때 로마 제국 전역의 도시에 중요한 수로였던 이들은 식수, 목욕, 농업을 위해 담수를 공급했다. 많은 로마 수도교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일부는 여전히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어, 이는 수천 년 전에 건설된 수도교의 내구력을 증명한다. 로마인이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건축 도구와 자원 없이 어떻게 그렇게 거대하고 복잡한 건축물을 지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이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짓기 위해 그들이 사용한 몇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1. 중력을 염두에 두고 건설된 로마 수도교 물이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도록 로마인들은 호수와 샘으로부터 아래로 경사진 수로를 설계하여 중력이 .. 2022. 9. 16.
야만족의 대이동 서로마 제국으로의 대이동... AD 395년 야만인의 침공 로마 제국 이 지도는 395년 로마 제국의 대략적인 국경을 보여준다. 2세기 초부터 거의 그대로 유지되어 온 방어선은 하드리아누스 장벽, 라인 강과 다뉴브 강, 사하라 사막이다. 페르시아와 끊임없이 분쟁을 벌이던 동방의 경계는 항상 다른 곳보다 조금 더 변동되었다. 이러한 방어선은 이제 곧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훈 4세기 후반과 5세기에 서로마 제국으로의 대이동을 촉발한 것은 훈족이었다. 그들은 유라시아의 넓은 지역에 퍼진 중앙아시아 부족의 연합체였다. 그들은 아틸라 통치(434-453년) 하에서 동유럽의 넓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지만, 로마 제국 내에는 많은 수가 정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 역사의 변두리에 머물렀다. 그들은 제국을.. 2022. 9. 9.
로마와 프랑키아의 오랜 전쟁 훈족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셀 수 없이 많은 게르만족들을 로마로 밀어냈다. 로마화 된 프랑크족은 제국이 무너지는 동안 갈리아를 방어해야 한다. 그러나 프랑크족이 더 성공적일수록 그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로마가 더 많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에서는 4세기 초에서 5세기 초로, 콘스탄티누스의 치세 말부터 갈리아에서 로마의 권위가 이양되기까지 나아갈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사망으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몰락까지 프랑크족과 로마인은 갈리아가 새로운 프랑키아(프랑크족의 땅)로 변모함에 따라 전자가 국민으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 후자를 대체하는 긴 과정에 관여했다. 이 과정은 로마가 내전에 휘말릴 때마다 라인 강 건너의 프랑크족이 갈리아를 침략했기 때문에 종종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프랑크족은 알레만니.. 2022. 8. 28.
신과 갈리아 기독교가 마침내 중심무대에 섰다! 2-3세기 동안 갈리아는 수많은 성인과 기적을 얻었고 기독교 세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박해와 이단은 신자들을 위협한다. 오늘의 에피소드는 177년부터 콘스탄티누스 치세까지 갈리아 기독교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여러 에피소드 동안 기독교는 더 큰 서사의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이제 마침내 자신만의 에피소드를 가질 때가 되었다. 마지막은 아니다. 기독교는 3세기 후반부터 21세기까지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세기부터 현재까지 기독교는 신자들의 비밀스러운 작은 모임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종교로 빠르게 변모했다. 2세기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 동부에 널리 퍼졌다. 3세기에 이르러는 로마의 다신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및 일련의 신비주의 .. 2022.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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