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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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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서유럽8

로마와 프랑키아의 오랜 전쟁 훈족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셀 수 없이 많은 게르만족들을 로마로 밀어냈다. 로마화 된 프랑크족은 제국이 무너지는 동안 갈리아를 방어해야 한다. 그러나 프랑크족이 더 성공적일수록 그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로마가 더 많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에서는 4세기 초에서 5세기 초로, 콘스탄티누스의 치세 말부터 갈리아에서 로마의 권위가 이양되기까지 나아갈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사망으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몰락까지 프랑크족과 로마인은 갈리아가 새로운 프랑키아(프랑크족의 땅)로 변모함에 따라 전자가 국민으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 후자를 대체하는 긴 과정에 관여했다. 이 과정은 로마가 내전에 휘말릴 때마다 라인 강 건너의 프랑크족이 갈리아를 침략했기 때문에 종종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프랑크족은 알레만니.. 2022. 8. 28.
신과 갈리아 기독교가 마침내 중심무대에 섰다! 2-3세기 동안 갈리아는 수많은 성인과 기적을 얻었고 기독교 세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박해와 이단은 신자들을 위협한다. 오늘의 에피소드는 177년부터 콘스탄티누스 치세까지 갈리아 기독교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여러 에피소드 동안 기독교는 더 큰 서사의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이제 마침내 자신만의 에피소드를 가질 때가 되었다. 마지막은 아니다. 기독교는 3세기 후반부터 21세기까지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세기부터 현재까지 기독교는 신자들의 비밀스러운 작은 모임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종교로 빠르게 변모했다. 2세기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 동부에 널리 퍼졌다. 3세기에 이르러는 로마의 다신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및 일련의 신비주의 .. 2022. 8. 24.
고대 브리튼의 무기와 갑옷 무기와 갑옷 시리즈. 고대 브리튼인을 시작으로 철기 시대, 로마 시대, 암흑기, 색슨족과 바이킹을 거쳐 1066년 노르만 정복까지 갑옷과 무기를 다룬다. BC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공 당시 고대 브리튼 전사 초기 브리튼인의 무기는 로마인의 무기에 비해 매우 원시적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그들의 전차 사용은 침략자들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은 검, 도끼, 칼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주된 무기는 창이었다. 카이사르에 따르면, 그들은 방어용 무구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가죽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로마의 저술가 헤로디아누스는 "그들은 흉갑과 투구의 사용법을 알지 못하며, 이것이 그들에게 장애가 될 것이라고 상상한다"라고 언급했다. BC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공 당시 로마 병사 로.. 2022. 8. 6.
로마 브리타니아 연대표 BC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처음으로 잉글랜드 해안선에 상륙한 때부터 AD 410년의 유명한 '자신의 방어선을 지켜라'는 편지에 이르기까지, 로마인은 400년 이상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글에서, 종종 험난한 관계의 우여곡절을 살펴본다! BC 55년 -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방문이 정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브리튼 섬에 대한 최초의 로마 군사 원정을 이끌었다. BC 54년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두 번째 원정; 다시 말하지만, 침공은 정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BC 27년 - 아우구스투스는 초대 로마 황제가 되었다. AD 43년 -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4개 군단에 브리튼을 정복하도록 명령했다. 43년 (8월) - 로마군이 에식스주 콜체스터에 있는 카투벨라우니 부족의 수도를.. 2022. 8. 3.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를 침공하여 갈리아와 마찬가지로 로마화 하기로 결심한다. 가족극과 반란은 게르만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준다. 다음은 로마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이자 갈리아, 로마 및 유럽의 역사를 정의하는 순간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면, 이방 영토를 정복하는 것은 쉽지만 유지하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정복된 문화가 정복자들과 완전히 다를 때 더 복잡해진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로마의 장군이자 제국의 계승자인 드루수스는 BC 9년에 서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여 마그나 게르마니아에 대한 로마 통치의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게르마니아가 정복될 경우 갈리아 반군은 갈리아 전쟁 동안 가끔 그랬던 것처럼 게르만족에게 도움을 요청할 능력을 잃게 된.. 2022. 6. 23.
갈리아 벨기카 갈리아 벨기카("벨기에 갈리아")는 오늘날 주로 프랑스 북부,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독일의 일부에 해당하는 로마 갈리아의 북동부에 위치한 로마 제국의 속주였다. BC 50년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 중 정복한 이후 이곳은 갈리아의 세 지역(트레스 갈리아이) 중 하나가 되었고, 나머지 두 지역은 갈리아 아퀴타니아와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이다. 공식적인 로마의 속주는 나중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BC 22년에 설립되었다. 이 속주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부족 연합인 벨가이의 이름을 따왔지만 트레베리족, 메디오마트리키족, 레우키족, 세콰니족, 헬베티족과 그 외 영토도 포함되었다. 마른 강과 센 강에 의해 형성된 벨기카의 남쪽 경계는 카이사르가 구분한 벨가이와 켈트 갈리아 사이의 문화적 경계.. 2021. 8. 6.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갈리아 루그두넨시스는 로마 제국의 속주로, 예전에는 켈티카로 알려진 켈트족 영역의 일부였으며, 지금은 프랑스 지역이다. 속주는 아마도 이탈리아 서쪽 로마 유럽의 주요 도시이며, 중요한 제국의 조폐국이 있는 주도 루그두눔(오늘날의 리옹)에서 이름을 따왔다. 루그두눔 외곽에는 로마와 아우구스투스 숭배를 기리기 위해 대표자들이 만나는 갈리아의 성소가 있었다. 역사 갈리아 정복(BC 58-50년)을 기술한 데 벨로 갈리코(De Bello Gallico)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미 로마의 속주였던 갈리아 남부의 프로빈키아 노스트라와 갈리아의 다른 세 지역, 즉 아퀴타니, 벨가이, 그리고 켈타이라고도 알려진 갈리를 구분했다. 갈리의 영역은 갈리아 벨기카와 경계를 이루는 북동부의 센 강과 마른 강에서 갈리아 아퀴타.. 2021. 8. 5.
갈리아 아퀴타니아 갈리아 아퀴타니아는 아키텐 또는 아퀴타니아 갈리아로 알려진 로마 제국의 속주였다. 이곳은 현재의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오늘날의 아키텐 지역에 이름을 붙였다.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와 접해 있었다. 아퀴타니아의 부족들 14개의 켈트 부족과 20개 이상의 아퀴타니아 부족이 남쪽의 피레네 산맥 북쪽 비탈에서 북쪽의 리게르(루아르) 강까지 이르는 지역을 차지했다. 아퀴타니족은 20개 이상의 부족이 있었지만, 그들은 수가 적고 평판이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부족은 바다를 따라 거주했고, 나머지 부족은 내륙과 켐메누스 산맥의 정상과 텍토사게스까지 있었다. 갈리아 코마타라는 이름은 종종 더 먼 갈리아의 세 속주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2021.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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