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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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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이야기177

첼리오 언덕 동쪽 지역과 데케니움 카일리우스의 동쪽, Regio II. 여기에 사비니 출신의 대가족인 발레리우스의 저택(도무스 발레리오룸)이 있었다. 저택은 아쿠아 클라우디아를 따라 카일리우스의 광대한 지역에 퍼져있었고 비탈에는 큰 정원이 있었다. 발레리우스 일족의 역사는 BC 509년 타르퀴니우스의 몰락에 참여하고 로마 공화국의 두 번째 집정관이 된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와 함께 시작되었다. 다른 거대한 도무스는 아벤티노 평지에 있는 발레리우스 포티투스의 것과 같이 이 가문의 구성원들에게 속했다. 발레리 궁전의 화려한 계단식 정원을 지난 후, 길다랗게 뻗어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어머니 도미티아 루킬라의 정원을 발견할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카일리우스에서 태어났으며, 하드리아누스의 궁전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받은.. 2021. 4. 28.
첼리오 언덕 서쪽 지역 첼리오 언덕(카일리우스 몬스) (Regio I)이라는 이름은 에트루리아 족장 카일리우스 비베누스에서 유래했으며 에스퀼리노 언덕과 아피아 가도 사이의 로마 남부에 위치해 있다. 거대한 아쿠아 클라우디아 수도교가 언덕 전체를 지나 팔라티노로 내려갔다. 제국 시대 이전에 카일리우스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티베리우스 시대에 격렬한 화재로 건물들을 완전히 태워버렸다. 재건축은 카일리우스를 다소 세련된 지역으로 변화시킨 화려한 저택(도무스)을 지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사진 오른쪽 중앙에 위치한 키일리우스의 북서쪽에 세워진 네로의 대시장(마켈룸 마그눔)이다. 더 멀리에는 사비니인의 사원인 카모이나이 신전이 있다. 로마의 행정장관이 시민의 재산재고표를 보관한 곳은 바로 이 사원이었다. 더 가까이에서 본 네로의 대시.. 2021. 4. 27.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셉티조디움 셉티조디움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궁전의 웅장한 측면을 완성하고 싶어 하던 시기에 지어졌다. 이 건물은 당시 알려진 7개의 행성(태양, 수성, 금성, 달, 화성, 목성, 토성)을 나타냈기 때문에 셉티조디움이라고 불렸다. 확실히 아피아 가도를 타고 로마에 온 방문객들은 황제의 궁전과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모퉁이에 셉티조디움이 나타나면서 장대한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사진 중앙에 있는 팔라티노의 전체 경관. 왼쪽에는 벨라브룸, 배경에 로마의 포룸이, 오른쪽 하단에는 대 키르쿠스(키르쿠스 막시무스)가 있다. 250,000석을 수용할 수 있는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의심할 여지없이 로마와 심지어 제국에서도 가장 컸다. 앞쪽에 있는 카르케레스는 트랙을 7바퀴 도는 경주의 출발 신호를 제공하는 데 사용되었다. 사진 상단.. 2021. 4. 26.
팔라티노 언덕 팔라티노 언덕은 공화정 시절 고위층인 키케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그리파, 그리고 훗날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인 옥타비아누스를 위한 단순한 주거지역이었다. 제국 지배하에, 그것은 간단히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는 광대한 궁전으로 더 부유해졌다. 사진의 왼쪽에는 티베리우스 궁전, 중앙에는 거대한 정사각형 구조를 형성한 도무스 플라비아와 도무스 아우구스타나, 오른쪽 위에는 스타디움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궁전이 있다. 멀리서 본 이 경관은 팔라티노의 궁전이 거대한 건축물이 되었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며, 건물들이 서로 붙어있어 건축 전체가 계획된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더 가까이에서 본 궁전의 중심부에 있는 도무스 플라비아와 함께 훌륭한 페리스타일(주랑 현관의 일종)과 연못이 보인.. 2021. 4. 25.
아벤티노 아래 평지와 테스타치오 언덕 사진 아래쪽에는 아벤티노 아래 평지와 테스타케우스 언덕의 일반적인 모습이 나타나 있다. 왼쪽 하단에는 오스티아 항으로 흘러가는 테베레 강의 굽은 부분이 있다. 아벤티노 평지에는 창고와 인슐라이, 저택이 밀집해 있었다. 데키우스 목욕탕을 돌아 아벤티노 언덕은 평지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사진의 중앙에서 언덕 꼭대기와 평지를 연결하는 길고 완만한 경사로의 비쿠스 플라타노니스와 아벤티노의 서쪽을 따라 이어지는 비쿠스 아밀루스트리를 짐작할 수 있다. 멋진 장소였기 때문에 장엄한 도무스(귀족이 살던 집)가 이 특별한 매력적인 지역에 지어졌다. 목욕탕과 스티뮬라의 신성한 나무(a) 가까이에 플라비우스 이울리우스 콰르투스의 저택(b)이 있었고, 파크투메이의 저택(c)은 진정한 궁전이었으며 확실히 평지 전체를 내.. 2021. 4. 24.
수라 목욕탕 (테르마이 수라나이) 아벤티노의 비탈에 있는 리키니우스 수라 목욕탕의 정원이 지금은 로마의 대 키르쿠스가 있는, 당시 마르키아 계곡을 향해 돌출되어 있었다. 클리부스 푸블리키우스에 위치한 수라 목욕탕. 보르툼누스 신전은 수라 목욕탕 가까이에 있었다. 보르툼누스는 계절의 신이었다. 사원은 BC 264년에 지어졌을지도 모른다. 보르툼누스 신전 산책로 앞의 콘수스 원형 신전. 북서쪽에서 본 보르툼누스 신전과 콘수스 신전. 출처 : maquettes-historiques 2021. 4. 23.
피스키나 푸블리카 사진 중앙에 카라칼라 목욕탕과 아피아와 마르키아 수도교 사이에 아우구스투스의 행정 구역 XII가 펼쳐져 있다. 이 지역은 피스키나 푸블리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과거에 로마의 젊은이들이 수영을 배우던 공공 수영장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아벤티노 기슭에 있는 거대한 저수지로, 사람들과 말을 씻는 물을 담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그 장소에 대한 식별은 BC 215년까지 올라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영장이 사라져도 이름은 남아 있었다. 계획에 따르면 저수지는 Q. 아이아키우스 켄소리누스의 저택이 위치한 곳에 있었어야 했는데, 더 아래에 위치했다. 소 아벤티노의 꼭대기에서 포르타 나이비아를 출발점으로 하여, 노바 가도에 도달하기 위해 지역을 가로질러 내려가는 클리부스 델피니를 따랐다. 비쿠스 포르.. 2021. 4. 22.
소 아벤티노 사진에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 건설되기 이전에도 아벤티노의 양쪽 봉우리를 모두 포함했던 옛 세르비우스 성벽을 볼 수 있으며 이 사진에는 하드리아누스의 사저가 세워진 융기된 장소가 보인다. 전경에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 있다. "하드리아누스의 사저"(프리바타 하드리아니)으로 알려진 이 멋진 건물은 소 아벤티노의 남쪽 지대에 여러 층으로 지어졌으며, 분명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저택보다 정원이 있는 궁전으로 여겨질 수 있다. 건축가 황제는 이 저택을 로마의 사저로 짓도록 내버려 두었을지 모르지만, 확실히 그 집에서 거주한 시간은 많지 않다. 사진 왼쪽에 있는 코르니피키아 저택. 이곳은 M. 우미디우스 콰드라투스와 결혼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여동생의 집일 수도 있다. 이 집은 하드리아누스의 사저처럼 아벤티노에.. 2021. 4. 21.
아벤티노 언덕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아벤티노 언덕(몬스 아벤티누스), Regio XIII은 높이가 아주 낮았다. 언덕은 실제로 작은 협곡이 공유하는 두 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첫 번째 봉우리는 테베레 강에 가깝고 두 번째 봉우리인 소 아벤티노(그리고 피스키나 푸블리카라고 불리는 로마의 Regio XII에 속하는 일부)는 더 남쪽에 있다. 공화국 동안에는 항상 인기 있는 지역이었으며 제국 시대에 더 많은 주거 지역이 되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은 라틴인의 연방 성소가 된 다이아나 사원을 지었다. 또 다른 오래된 종교 건물인 미네르바 사원도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데키우스 목욕탕 외에도 트라야누스 황제의 친구 중 한 명이 사설 목욕탕인 수라 목욕탕을 지었다. 아벤티노에서 가장 큰 건축물인 데키우스 목욕탕.. 2021. 4. 20.
카피톨리움/카피톨리노 언덕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카피톨리노(이탈리아어: 캄피돌리오, 라틴어: 몬스 카피톨리누스), REGIO VIII은 로마의 종교적 중심지였다. 사진의 중앙에 있는 주요 사원은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 또는 최고신 유피테르의 사원이다. 여러 번 불에 타고 항상 같은 장소에 재건되었다. 이곳은 로마의 정치적, 종교적 상징이었다. 몇몇 도시들도 자신들만의 카피톨리노를 가지고 있었다. 이 언덕은 두 개의 봉우리, 오른쪽 아르스(Arx)와 앞쪽에 있는 카피톨리눔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 아래쪽에 있는 가파른 지형은 타르페이안 바위와 100 계단이다. 이 바위 꼭대기에서 반역자들이 던져졌다. 제국이 끝날 무렵, 이곳은 성역과 기념물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다. 언덕이 끝나는 북서쪽 끝에서 쇠퇴한 로마 포룸이 전경에 보인다.. 2021. 4. 19.
라티나 가도(Via Latina) 비아 라티나(라틴어 "라틴 길"의 의미)는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약 200 km에 이르는 이탈리아의 로마 도로였다. 경로 길은 로마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포르타 라티나에서 알기다스 산의 길로 이어졌다. 도로는 로마의 초창기 군사 역사에서 중요했다. 캄파니아로 가는 경로로 아피아 가도보다 앞서 존재했으며 BC 334년 칼레스에 라틴식민지가 세워지고 로마에서 도로로 접근할 수 있었던 반면 아피아 가도는 22년 후에 만들어졌다. 또한 직선처럼 곧은 아피아 가도가 극복해야 했던 공학적인 어려움 없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병참선을 따른다. 노선으로서, 라비카나 가도보다 앞섰지만, 라비카나는 나중에 선호되었을 수 있다. 교차점 이후, 라티나 가도는 트레루스(사코) 계곡을 따라 나폴리로 가는 현대 철도 노선을 따라 헤르.. 2021. 4. 18.
아피아 가도(Via Appia) 아피아 가도(라틴어 및 이탈리아어: 비아 아피아)는 고대 공화국에서 가장 빠르고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로마의 도로 중 하나이다. 길은 로마와 이탈리아 남동부의 브린디시를 연결했다. 그 중요성은 스타티우스가 기록한 일반 이름으로 표시된다. 「 아피아 롱가룸··· 레기나 비아룸 "기다란 길의 여왕 아피아 가도" 」 이 도로의 이름은 BC 312년 삼니움 전쟁 동안 남쪽으로 가는 군사도로로 첫 구간을 완공한 로마의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태생 도로의 필요성 아피아 가도는 BC 312년에 그 목적을 위해 건설된 이래 군사 지원의 주요 경로로 사용된 로마 도로였다. 아피아 가도는 로마 지역 바깥으로 (로마인에게 필수적인) 군대를 수송하기 위해 특별히 건설된 최초의 긴 도.. 2021. 4. 14.
로마 가도/비아이 로마나이(viae Romanae) 로마 가도(라틴어: 비아이 로마나이(viae Romanae), 단수: 비아 로마나(via Romana), "로마의 길"이라는 의미)는 로마 국가의 유지와 발전에 필수적인 물리적 인프라였으며, BC 300년 경부터 로마 공화국과 로마 제국의 확장과 통합을 통해 건설되었다. 가도는 군대, 관리, 민간인, 제국 내 연락망, 무역 상품의 효율적인 육로 수송을 제공하였다. 로마의 길은 작은 지방 도로에서부터 도시, 주요 도시, 군사 기지를 연결하기 위해 건설된 광범위하고 장거리 고속도로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가 있었다. 이 주요 가도는 종종 돌로 포장되고 금속으로 처리되었고, 배수를 위해 경사가 있으며 보행자 길, 교각, 배수 도랑이 측면에 있었다. 가도는 정확하게 조사된 코스를 따라 놓였고, 일부는 언덕을 관통.. 2021. 3. 31.
바르키노(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는 2000년 전 로마의 콜로니였던 바르키노(Barcino)에서 유래했다. BC 15-10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세워졌으며, 라틴어 이름은 이울리아 아우구스타 파벤티아 파테르나 바르키노(Iulia Augusta Faventia Patherna Barcino)였다. 바르키노의 많은 유적들은 여전히 바르셀로나 고딕 지구의 다양한 장소에 남아 있다. 바르키노가 설립된 지역은 이미 고대 이베리아 라이에타니 부족(거리 이름인 비아 라이에타나에서 유래)이 거주하고 있었다. 식민지로써, 바르키노는 퇴역 군인에게 토지를 분배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로마의 주요 도시인 타라코(타라고나)와 카이사라우구스타(사라고사)보다 덜 중요했다. 1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바르키노 주변에 성벽이 세워졌고, 3세기에서 4세.. 2021. 3. 30.
아프리카 노바/누미디아 누미디아는 북아프리카 해안의 로마 속주로 대략 알제리 북동부의 영토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 이 지역 사람들은 BC 2세기경 폴리비우스에 의해 처음으로 누미디아인으로 확인되었지만 그들은 종종 노디디아인으로 불렸다. 누미디아 동부는 BC 46년에 새로운 로마의 속주인 아프리카 노바를 만들기 위해 합병되었다. 누미디아 서부도 BC 40년에 마지막 왕인 아라비오가 사망한 후 합병되었으며 두 지역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트리폴리타나와 합쳐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로 창설했다. AD 40년에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의 서부 지역은 주둔 군단이 포함된 황제 레가투스 아래 배치되었으며 누미디아의 레가투스는 AD 203년까지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에 명목상 속해 있었지만 사실상 누미디아라는 별도의 속주가 되었다. 2세기에 이.. 2021.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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