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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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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이야기177

갈리아 전쟁 - 5편 BC 53 소요를 억압하다 BC 54년의 겨울 봉기는 로마인에게 큰 실패였다. 한 개 군단은 완전히 잃었고 다른 군단은 전사자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반란은 로마인이 진정으로 갈리아를 호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완전히 정복하고 앞으로 있을 저항을 방지하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7개 군단으로 줄어든 그는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두 개 군단이 더 모집되었고 하나는 폼페이우스에게서 빌렸다. 로마군은 이제 4만-5만 명의 병사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날씨가 따뜻해지기 전에 잔인한 캠페인을 일찍 시작했다. 그는 네르비족을 공격하여 습격하고 마을을 불태웠으며 가축을 빼앗고 포로로 잡는 것에 힘을 집중했다. 이 전략은 효과가 있었고 네르비는 즉시 항복했다. 로마군은 캠페인 시즌이.. 2021. 2. 26.
갈리아 전쟁 - 4편 BC 55년 라인 강과 영국 해협을 건너다 전술적 관심 이상으로 명성에 대한 필요성 때문에 BC 55년에 카이사르의 캠페인을 결정했을 것이다. 그해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이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정치적 동맹이었지만 또한 그의 라이벌이었다. 집정관들이 쉽게 흔들리고 여론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대중의 시선을 유지해야 했다. 그의 해결책은 로마 군대가 시도하지 않은 곳인 라인 강과 영국 해협을 횡단하는 것이었다. 라인 강을 건넌 것은 게르만 켈트족의 불안의 결과였다. 수에비족은 최근에 켈트의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을 그들의 땅에서 강제로 몰아내었고 그들은 새로운 땅을 찾기 위해 라인 강을 건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정착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했고 문제는 전쟁으로 바뀌었다. .. 2021. 2. 24.
갈리아 전쟁 - 3편 BC 57년 동쪽의 캠페인 BC 58년 카이사르의 놀라운 승리는 갈리아 부족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역을 정복하려 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며 일부는 로마와의 동맹을 추구했다. BC 57년 캠페인 시즌이 시작되면서 양측은 새로운 병사를 모집하느라 바빴다. 카이사르는 전년보다 두 개 군단이 더 많았고 3만 2천-4만 명의 군단병과 보조군으로 출발했다. 갈리아인이 모집한 병사의 정확한 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카이사르는 20만 명과 싸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갈리아 내 갈등에 다시 개입한 카이사르는 대략 오늘날의 벨기에 지역에 거주했던 벨가이족에 맞서기 위해 진군했다. 그들은 최근에 로마와 동맹을 맺은 한 부족을 공격했고 군대와 함께 진군하기 전에 카이사르는 레미족과 다른 이웃 갈리.. 2021. 2. 23.
갈리아 전쟁 - 2편 과정 전쟁의 시작 - 헬베티족에 대한 캠페인 헬베티족은 스위스 중앙 고지에 살았던 약 5개의 동족으로 이루어진 갈리아 부족 연합으로 산맥과 라인 강과 론 강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게르만 부족들로부터 북쪽과 동쪽으로 증가되는 압력을 받아 BC 61년 경에 이주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갈리아를 가로질러 서쪽 해안으로 여정을 하려고 했는데 이 길은 하이두이족(로마의 동맹)과 갈리아 트란살피나 로마 속주를 통과하는 경로였다. 이주하는 동안 부족들 사이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는 귀족 오르게토릭스의 음모가 발견되었고 그는 자살했다. 이 일이 부족의 이주를 지연시키지는 않았다. 이주 소식이 퍼지면서 이웃 부족들은 우려가 커졌고 로마는 여러 부족에 대사를 보내 헬베티에 합류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로마에서는 게르.. 2021. 2. 23.
갈리아 전쟁 - 1편 갈리아 전쟁은 BC 58년에서 50년 사이에 수많은 갈리아 부족을 상대로 로마의 총독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행한 정복 캠페인이다. 전쟁은 BC 52년 결정적인 알레시아 전투에서 정점에 이르렀으며 로마의 완전한 승리로 인해 갈리아 전체(주로 현재의 프랑스와 벨기에)로 로마 공화국이 확장되었다. 군사적으로 로마인만큼 강력했지만 갈리아 부족의 내부 분열은 카이사르의 승리를 용이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로마의 침공에 맞서 갈리아를 통합하려는 베르킨게토릭스의 시도는 너무 늦었다. 카이사르가 침략을 선제적이고 방어적인 행동으로 묘사했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가 주로 정치 경력을 높이고 막대한 부채를 갚기 위해 전쟁을 치렀다는 데 동의한다. 그래도 갈리아에서 갈리아 원주민과 북쪽에 있는 원주민 부족이 로마인에게.. 2021. 2. 22.
킬리키아 에트 키프로스 킬리키아는 오늘날 터키의 남부 (지중해) 해안에 위치한 로마 속주였다. 킬리키아는 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를 한 후 BC 64년에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297년경에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세분화되었고 이슬람에 정복될 때까지 수세기 동안 로마 통치하에 남아있었다. 첫 접촉과 속주 설립 (BC 103-47) 이 지역은 로마인과의 노예무역으로 이익을 얻은 해적들의 안식처였다. 킬리키아의 해적들이 로마 선박과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로마 원로원은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지휘관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개입 과정에서 킬리키아 속주가 생겨났다. 킬리키아 페디아스(킬리키아 동부)의 일부는 BC 10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의 해적과의 첫 번째 캠페인 중에 로마 영토가.. 2021. 2. 21.
로마 시리아 로마 시리아는 BC 64년 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대왕의 패배 이후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 공화국에 합병된 로마 속주였다. AD 6년 헤로데 왕국이 4개로 분할된 후 로마 시리아가 이투라이아와 트라코니티스를 합병하면서 점차 로마 속주로 흡수되었다. 시리아 속주 제국 시대 초반, 시리아의 로마군은 파르티아에 접한 국경 방어를 위해 세 개의 군단과 보조군이 주둔했다. 유대 왕국은 AD 6년에 사분된 후, AD 34년 경에 로마 시리아가 이투라이아와 트라코니티스를 합병하면서 로마 속주로 점차 흡수되었다. 시리아 속주의 군단은 AD 66-70년의 1차 유대-로마 전쟁에 직접 참여했다. AD 66년 시리아의 장군 케스티우스 갈루스는 풀미나타 12군단을 중심으로 보조군으로 보강된 시리아 .. 2021. 2. 20.
비티니아 에트 폰투스 비티니아와 폰투스는 아나톨리아(터키)의 흑해 연안에 있는 로마 제국의 속주 이름이었다. 그것은 로마 공화국 후기에 이전의 비티니아 왕국(BC 74년 로마 속주가 됨)과 폰투스(BC 63년에 합병됨)가 합쳐져 형성되었다. BC 74년에 비티니아는 로마가 왕국의 오랜 적 폰투스로부터 보호해주기를 바라며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4세에 의해 로마로 넘어갔다. 니코메데스의 손님이자 친구이며 당시 청년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영향과 원로원에서 고인이 된 왕의 누이 니사(Nysa)의 열렬한 연설 덕분에 유증이 수락되었다. 카이사르가 니코메데스와의 관계에 대해 끔찍한 비방을 견뎌야 했지만 비티니아는 민중들이 환호하는 국책이 되었다. 집정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책임자로 속주를 확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율.. 2021. 2. 19.
크레타 에트 키레나이카 크레타와 키레나이카는 BC 67년에 설립된 로마 제국의 원로원 속주로 크레타 섬과 현재 리비아의 키레나이카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아피온의 의지와 로마의 키레나이카 통치 헬레니즘 왕국 키레나이카의 마지막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아피온은 BC 96년에 자녀 없이 사망했을 때 그의 왕국을 로마 공화국으로 유증 했다.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아피온으로부터 이 상속을 쉽게 받아들였지만 직접 지배하기보다는 행정권을 지역 통치자에게 맡기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BC 70년대에 이르러 유대인 정착민들의 시민 봉기는 이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기 시작했고 원로원은 조치를 취해야 했다. BC 74년 그들은 하급 관리인 코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를 파견하여 공식적으로 키레나이카를 로마의 영토로 합병하고 질서를 회복했다. 원.. 2021. 2. 3.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는 현재 프랑스 남부의 랑그도크루시용과 쁘호벙스(프로방스)에 위치한 로마의 속주이다. 이 지역은 알프스 북부의 첫 번째 로마 속주인 프로빈키아 노스트라("우리 지방")와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 키살피나와 구별되는 갈리아 트란살피나로도 알려져 있다. BC 2세기 후반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 경계는 대략 남쪽의 지중해와 서쪽과 북쪽의 쎄벤느와 알프스에 의해 정의되었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의 서부 지역은 셉티마니아로 알려졌다. 명명 갈리아 트란살피나는 BC 118년 해안에 세워진 로마 식민지 콜로니아 나르보 마르티우스(현재의 나르본에 위치한 구어체로 나르보로 알려진)의 새로 설립된 주도를 따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로마인들은 이 곳을 프로빈키아 노스트라("우리 지방".. 2021. 2. 3.
아시아 비잔틴 시대에 프리기아라고 불리는 로마의 아시아 또는 아시아나 속주는 공화국 후기에 추가된 행정 구역으로 프로콘술(집정관 경력자) 총독이 관리하는 원로원 속주였다. 211년 로마 제국의 재편성에서도 그 통치 방식은 변경되지 않았다. 배경 "아시아"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Ἀσία에서 유래했으며 원래는 에게 해 동쪽 해안의 아수와를 점령한 리디아인들에게 적용되었다. 리디아에서 그리스에 가까운 해안에 사용했지만 점차 리디아(오늘날 터키의 북서부)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로마의 아시아 속주는 리디아 왕국의 면적을 거의 정확히 차지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단어는 동쪽의 미지의 지역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 대왕은 BC 190년 로마인들이 역사적인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그의 군대를 분쇄했을 .. 2021. 2. 3.
아프리카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는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한 후 BC 146년에 만들어진 북아프리카 해안의 로마 속주이다. 대략 현재의 튀니지 영토, 알제리의 북동쪽, 그리고 시드라 만을 따라 리비아 서부 해안으로 구성되었다. 이곳에는 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의 원주민이며 라틴어로 마우리인이라 불려진 베르베르 사람들이 살았다. BC 9세기에 페니키아인은 해운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지중해를 따라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그중 카르타고는 BC 8세기부터 로마 공화국에 정복될 때까지 지배권을 얻었다. 로마 제국 서부에서 이탈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부유한 속주 중 하나였다. 카르타고 시를 제외하고 이 속주의 다른 대규모 정착지는 로마 제국 후기의 속주인 비자케나의 주도 하드루메툼(현재의 수스, 튀니지)과 .. 2021. 2. 2.
마케도니아 로마 장군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BC 148년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마지막 자칭 왕인 안드리스코스를 물리친 후 로마가 이 지역에 세운 4개의 종속 공화국을 해체하여 BC 146년 마케도니아 속주를 정식으로 만들었다. 이 속주는 에피로스, 테살리아 및 일리리아, 파이오니아 및 트라키아의 일부를 추가하여 이전의 마케도니아 왕국과 통합해서 훨씬 더 큰 행정 구역을 만들었다. 서술 조직 3세기 후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이후 에피로스 노바가 분리되었고, 4세기에 마케도니아 속주는 남부의 마케도니아 프리마와 북부의 마케도니아 세쿤다 또는 살루타리스로 분리되었다. 이 속주는 모두 마케도니아 관구에 종속되어 있으며 일리리쿰의 프라이토르 행정 구역으로 구성된 3개의 관구 중 하나였다. 379년에 서부 제국.. 2021. 1. 23.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먼 이베리아" 또는 가끔 "저쪽의 이베리아")는 로마 공화국 당시 히스파니아 속주로 대략 바이티카와 현재 스페인의 과달키비르 강 계곡에 위치했으며 루시타니아(현재 포르투갈, 엑스트레마두라) 전체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살라망카 지방의 작은 부분)과 갈라이키아(현재 북부 포르투갈 및 갈리시아). 주도는 코르두바였다. 속주는 카르타고 노바에서 칸타브리아 해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 있었다.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는 현재 안달루시아, 포르투갈, 엑스트레마두라, 카스티야 이 레온,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칸타브리아 및 바스크 지방으로 구성되었다. 루시타니아인이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를 공격한 BC 155년 전까지 이 지역은 평화로웠다. 로마의 법무관을 두 번 패배시킨 그들의 성공은 곧 이베리아 .. 2021. 1. 23.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이쪽의 이베리아" 또는 "가까운 이베리아")는 로마 공화국 기간 동안 히스파니아의 로마 속주이다. 스페인 무르시아 자치 공동체에 있는 오늘날의 카르타헤나인 카르타고 노바 마을까지 이베리아 동부 해안에 있었다. 대략 오늘날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발렌시아의 자치 단체도 속했다. 더 남쪽에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진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먼 이베리아")의 로마 속주가 있었다. 두 속주는 2차 포에니 전쟁(BC 218-201)이 끝난 지 4년 후인 BC 197년에 만들어졌다. 이 전쟁 동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BC 206년 일리파 전투(세비야 근처)에서 카르타고인을 격파했다. 이로 인해 로마인은 스페인 남부와 동부 해안에서 에브로 강까지의 카르타고 영토를 차지했.. 2021.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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