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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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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속주30

아이깁투스/이집트 - 1편 이집트(라틴어: 아이깁투스, 코이네 그리스어: 아이깁토스)는 BC 30년 로마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합병한 이후 AD 641년 이슬람의 정복으로 비잔틴 제국이 잃을 때까지 로마 제국의 한 부분이었다. 이 속주는 시나이를 제외한 오늘날의 이집트 대부분을 포함하고 서쪽으로는 크레타와 키레나이카 속주, 동쪽으로는 유대(나중에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속주와 접해 있었다. 이집트는 제국의 주요 곡물 생산국 역할을 하게 되었고 고도로 발달된 도시 경제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깁투스는 로마 동부 속주 중 단연코 가장 부유한 속주였고 이탈리아 이외의 지역에서도 가장 부유한 로마 속주였다. 로마 이집트의 인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추정치는 400만에서 800만까지 다양하다.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가장 큰 항구를 소유하고 있.. 2021. 7. 22.
아프리카 노바/누미디아 누미디아는 북아프리카 해안의 로마 속주로 대략 알제리 북동부의 영토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 이 지역 사람들은 BC 2세기경 폴리비우스에 의해 처음으로 누미디아인으로 확인되었지만 그들은 종종 노디디아인으로 불렸다. 누미디아 동부는 BC 46년에 새로운 로마의 속주인 아프리카 노바를 만들기 위해 합병되었다. 누미디아 서부도 BC 40년에 마지막 왕인 아라비오가 사망한 후 합병되었으며 두 지역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트리폴리타나와 합쳐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로 창설했다. AD 40년에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의 서부 지역은 주둔 군단이 포함된 황제 레가투스 아래 배치되었으며 누미디아의 레가투스는 AD 203년까지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에 명목상 속해 있었지만 사실상 누미디아라는 별도의 속주가 되었다. 2세기에 이.. 2021. 2. 27.
킬리키아 에트 키프로스 킬리키아는 오늘날 터키의 남부 (지중해) 해안에 위치한 로마 속주였다. 킬리키아는 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를 한 후 BC 64년에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297년경에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세분화되었고 이슬람에 정복될 때까지 수세기 동안 로마 통치하에 남아있었다. 첫 접촉과 속주 설립 (BC 103-47) 이 지역은 로마인과의 노예무역으로 이익을 얻은 해적들의 안식처였다. 킬리키아의 해적들이 로마 선박과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로마 원로원은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지휘관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개입 과정에서 킬리키아 속주가 생겨났다. 킬리키아 페디아스(킬리키아 동부)의 일부는 BC 10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의 해적과의 첫 번째 캠페인 중에 로마 영토가.. 2021. 2. 21.
로마 시리아 로마 시리아는 BC 64년 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대왕의 패배 이후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 공화국에 합병된 로마 속주였다. AD 6년 헤로데 왕국이 4개로 분할된 후 로마 시리아가 이투라이아와 트라코니티스를 합병하면서 점차 로마 속주로 흡수되었다. 시리아 속주 제국 시대 초반, 시리아의 로마군은 파르티아에 접한 국경 방어를 위해 세 개의 군단과 보조군이 주둔했다. 유대 왕국은 AD 6년에 사분된 후, AD 34년 경에 로마 시리아가 이투라이아와 트라코니티스를 합병하면서 로마 속주로 점차 흡수되었다. 시리아 속주의 군단은 AD 66-70년의 1차 유대-로마 전쟁에 직접 참여했다. AD 66년 시리아의 장군 케스티우스 갈루스는 풀미나타 12군단을 중심으로 보조군으로 보강된 시리아 .. 2021. 2. 20.
비티니아 에트 폰투스 비티니아와 폰투스는 아나톨리아(터키)의 흑해 연안에 있는 로마 제국의 속주 이름이었다. 그것은 로마 공화국 후기에 이전의 비티니아 왕국(BC 74년 로마 속주가 됨)과 폰투스(BC 63년에 합병됨)가 합쳐져 형성되었다. BC 74년에 비티니아는 로마가 왕국의 오랜 적 폰투스로부터 보호해주기를 바라며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4세에 의해 로마로 넘어갔다. 니코메데스의 손님이자 친구이며 당시 청년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영향과 원로원에서 고인이 된 왕의 누이 니사(Nysa)의 열렬한 연설 덕분에 유증이 수락되었다. 카이사르가 니코메데스와의 관계에 대해 끔찍한 비방을 견뎌야 했지만 비티니아는 민중들이 환호하는 국책이 되었다. 집정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책임자로 속주를 확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율.. 2021. 2. 19.
크레타 에트 키레나이카 크레타와 키레나이카는 BC 67년에 설립된 로마 제국의 원로원 속주로 크레타 섬과 현재 리비아의 키레나이카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아피온의 의지와 로마의 키레나이카 통치 헬레니즘 왕국 키레나이카의 마지막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아피온은 BC 96년에 자녀 없이 사망했을 때 그의 왕국을 로마 공화국으로 유증 했다.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아피온으로부터 이 상속을 쉽게 받아들였지만 직접 지배하기보다는 행정권을 지역 통치자에게 맡기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BC 70년대에 이르러 유대인 정착민들의 시민 봉기는 이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기 시작했고 원로원은 조치를 취해야 했다. BC 74년 그들은 하급 관리인 코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를 파견하여 공식적으로 키레나이카를 로마의 영토로 합병하고 질서를 회복했다. 원.. 2021. 2. 3.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는 현재 프랑스 남부의 랑그도크루시용과 쁘호벙스(프로방스)에 위치한 로마의 속주이다. 이 지역은 알프스 북부의 첫 번째 로마 속주인 프로빈키아 노스트라("우리 지방")와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 키살피나와 구별되는 갈리아 트란살피나로도 알려져 있다. BC 2세기 후반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 경계는 대략 남쪽의 지중해와 서쪽과 북쪽의 쎄벤느와 알프스에 의해 정의되었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의 서부 지역은 셉티마니아로 알려졌다. 명명 갈리아 트란살피나는 BC 118년 해안에 세워진 로마 식민지 콜로니아 나르보 마르티우스(현재의 나르본에 위치한 구어체로 나르보로 알려진)의 새로 설립된 주도를 따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로마인들은 이 곳을 프로빈키아 노스트라("우리 지방".. 2021. 2. 3.
아시아 비잔틴 시대에 프리기아라고 불리는 로마의 아시아 또는 아시아나 속주는 공화국 후기에 추가된 행정 구역으로 프로콘술(집정관 경력자) 총독이 관리하는 원로원 속주였다. 211년 로마 제국의 재편성에서도 그 통치 방식은 변경되지 않았다. 배경 "아시아"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Ἀσία에서 유래했으며 원래는 에게 해 동쪽 해안의 아수와를 점령한 리디아인들에게 적용되었다. 리디아에서 그리스에 가까운 해안에 사용했지만 점차 리디아(오늘날 터키의 북서부)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로마의 아시아 속주는 리디아 왕국의 면적을 거의 정확히 차지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단어는 동쪽의 미지의 지역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 대왕은 BC 190년 로마인들이 역사적인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그의 군대를 분쇄했을 .. 2021. 2. 3.
아프리카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는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한 후 BC 146년에 만들어진 북아프리카 해안의 로마 속주이다. 대략 현재의 튀니지 영토, 알제리의 북동쪽, 그리고 시드라 만을 따라 리비아 서부 해안으로 구성되었다. 이곳에는 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의 원주민이며 라틴어로 마우리인이라 불려진 베르베르 사람들이 살았다. BC 9세기에 페니키아인은 해운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지중해를 따라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그중 카르타고는 BC 8세기부터 로마 공화국에 정복될 때까지 지배권을 얻었다. 로마 제국 서부에서 이탈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부유한 속주 중 하나였다. 카르타고 시를 제외하고 이 속주의 다른 대규모 정착지는 로마 제국 후기의 속주인 비자케나의 주도 하드루메툼(현재의 수스, 튀니지)과 .. 2021. 2. 2.
마케도니아 로마 장군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BC 148년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마지막 자칭 왕인 안드리스코스를 물리친 후 로마가 이 지역에 세운 4개의 종속 공화국을 해체하여 BC 146년 마케도니아 속주를 정식으로 만들었다. 이 속주는 에피로스, 테살리아 및 일리리아, 파이오니아 및 트라키아의 일부를 추가하여 이전의 마케도니아 왕국과 통합해서 훨씬 더 큰 행정 구역을 만들었다. 서술 조직 3세기 후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이후 에피로스 노바가 분리되었고, 4세기에 마케도니아 속주는 남부의 마케도니아 프리마와 북부의 마케도니아 세쿤다 또는 살루타리스로 분리되었다. 이 속주는 모두 마케도니아 관구에 종속되어 있으며 일리리쿰의 프라이토르 행정 구역으로 구성된 3개의 관구 중 하나였다. 379년에 서부 제국.. 2021. 1. 23.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먼 이베리아" 또는 가끔 "저쪽의 이베리아")는 로마 공화국 당시 히스파니아 속주로 대략 바이티카와 현재 스페인의 과달키비르 강 계곡에 위치했으며 루시타니아(현재 포르투갈, 엑스트레마두라) 전체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살라망카 지방의 작은 부분)과 갈라이키아(현재 북부 포르투갈 및 갈리시아). 주도는 코르두바였다. 속주는 카르타고 노바에서 칸타브리아 해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 있었다.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는 현재 안달루시아, 포르투갈, 엑스트레마두라, 카스티야 이 레온,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칸타브리아 및 바스크 지방으로 구성되었다. 루시타니아인이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를 공격한 BC 155년 전까지 이 지역은 평화로웠다. 로마의 법무관을 두 번 패배시킨 그들의 성공은 곧 이베리아 .. 2021. 1. 23.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이쪽의 이베리아" 또는 "가까운 이베리아")는 로마 공화국 기간 동안 히스파니아의 로마 속주이다. 스페인 무르시아 자치 공동체에 있는 오늘날의 카르타헤나인 카르타고 노바 마을까지 이베리아 동부 해안에 있었다. 대략 오늘날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발렌시아의 자치 단체도 속했다. 더 남쪽에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진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먼 이베리아")의 로마 속주가 있었다. 두 속주는 2차 포에니 전쟁(BC 218-201)이 끝난 지 4년 후인 BC 197년에 만들어졌다. 이 전쟁 동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BC 206년 일리파 전투(세비야 근처)에서 카르타고인을 격파했다. 이로 인해 로마인은 스페인 남부와 동부 해안에서 에브로 강까지의 카르타고 영토를 차지했.. 2021. 1. 23.
사르디니아(사르데냐) 에트 코르시카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 속주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섬을 포함한 고대 로마의 속주였다. 역사 로마는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와 초기 조약을 체결했지만 이 협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용병 전쟁 동안 무력으로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를 합병했다. 이것은 서부 지중해에서 로마 지배의 시작을 의미했다. 로마인들은 694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했다. 그러나 사르디니아인과 코르시카인은 종종 로마 통치자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BC 235년에 반란이 일어났지만 만리우스 토콰투스에게 과격하게 진압되었다. 다른 반란은 BC 233년에 일어났고 집정관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에게 억압되었다. BC 232년에 집정관 만리우스 폼필리우스에게 패배했다. BC 231년 광범위한 긴장에 비추어 각 섬을 처리하기 위해 집정.. 2021. 1. 16.
시킬리아(시칠리아) 시킬리아는 로마 공화국이 인수한 최초의 속주이다. 섬의 서쪽 부분은 BC 241년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이 끝날 때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BC 227년 경부터 법무관이 섬에 정규 부임했다. 히에론 2세의 시라쿠사 왕국은 BC 212년 2차 포에니 전쟁 중 패배할 때까지 로마의 독립 동맹국으로 남아있었다. 그 후 속주에는 시칠리아 섬 전체, 몰타 섬, 그리고 작은 섬 그룹(에가디 제도, 리파리 제도, 우스티카, 판텔레리아)이 포함되었다. 로마 공화국 동안 이 섬은 로마시의 주요 곡물 공급원이었다. 징세는 무거웠으며 BC 2세기에 1차 및 2차 노예 전쟁으로 알려진 무장봉기를 유발했다. 1세기에 로마 총독 베레스는 키케로를 통해 부패한 것으로 유명했다. 로마 공화국을 종식시킨 내전에서 시킬리아는 2.. 2021. 1. 12.
로마 속주 로마 속주(라틴어 : 프로빈키아)는 이탈리아 이외의 로마 제국의 행정 구역으로 공화국 하에서 로마인이 통제하고 나중에는 제국 하에서 통치했다. 각 지방은 총독으로 임명된 로마인에 의해 통치되었다. 개요 속주는 사분통치(AD 293년부터) 전까지 이탈리아 바깥의 제국 영토 소유의 가장 큰 영토 및 행정 단위의 기본이 되었다. 현재 영어에서 사용되는 지방(province)이라는 단어는 로마인이 사용하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 속주는 일반적으로 원로원 의원 계급의 정치인, 일반적으로 전 집정관 또는 전 법무관이 통치했다. 이후의 예외는 이집트 속주로,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이후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포함되었고 아마도 원로원의 야망에 대한 견제를 위해 기사 계급의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 예외는 독특하지만 이전.. 2021.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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