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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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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142

로마 제국의 유산 지도 로마 제국의 도서관, 극장, 목욕탕 국가별 로마 극장 및 원형 경기장 수 이탈리아 141개 프랑스 51개 튀니지 38개 튀르키예 36개 스페인 29개 잉글랜드 17개 이스라엘 12개 이집트 10개 스위스, 불가리아, 알제리 시리아, 요르단 9개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리비아 7개 포르투갈, 그리스 5개 웨일스, 독일, 북마케도니아 4개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3개 스코틀랜드, 키프로스 2개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세르비아, 모로코, 몰타, 레바논 1개 북유럽에서 발견된 250년 이전의 로마 주화 및 저장물 분포 로마 주화가 영국에서 발견된 곳 로마의 화폐는 금, 은, 청동, 오리칼쿰(아연이 함유된 황동), 구리 주화로 구성되었다. BC 3세기부터 로마 공화국에 도입된 이래, 제국 시대에 .. 2022. 3. 11.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관한 사실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로마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이 기사의 첫 번째 부분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는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생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이 정치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을 때 태어났다. 아우구스투스에서 시작된 로마의 상승은 끝이 나고, 황제들은 연이어 폐위되었으며, 새로운 통치자는 몇 년 이상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혼란의 시기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위에 오르면서 끝이 났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쇠퇴를 막기 위해 경제, 사회, 군사 개혁을 단행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사두정치(테트라르키아)라고 불리.. 2022. 1. 27.
시기에 따른 로마 제국의 지도 로마 제국 지도는 로마가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탈리아의 공화국 로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려진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발전했다. 오현제의 치세 동안, 로마 제국은 권력의 절정에 있었다. 로마인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적, 철학적, 의학적 토대 위에 위대한 문명을 건설했고 군사, 행정, 건축 및 법률과 같은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현대 서구 문명의 행정적, 법적 기반을 구축했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로 세워져 팽창주의 정책을 따름으로써 다른 도시국가들을 통제했다. 첫째, 이탈리아에 대한 절대 권력을 확립하고 지중해 전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군사력 면에서는 어떤 경쟁 군대보다 우수한 군사 체계를 구축했고, 회복력이 좋고 단련된 전사들인 군단병이라는 .. 2022. 1. 21.
AD 43-425년 로마 브리타니아 AD 43년 로마인은 시즌 후반에 군대를 3개(그중 하나는 브리튼인의 허를 찌르기 위한 속임수였을 수도 있음)로 나누어 도착했다. 그들은 켄트의 리치보로와 웨스트서식스의 치체스터에 상륙했고, 처음에는 싸울 상대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브리튼인은 매우 현명하게 언덕과 습지로 이동하여 로마군이 보급품을 다 소모하길 바라며 시야에 띄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로마군은 카투벨라우니의 토고둠누스와 그의 형제 카라타쿠스를 상대로 승리를 기록했고, 카라타쿠스에 대한 승리는 아마도 켄트에서였을 것이다. 도분니의 구성원들은 (아마도 사절을 통해) 즉시 항복했고, 카투벨라우니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투벨라우니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들은 아마도 켄트의 메드웨이 강에서 로마군을 만나 비.. 2022. 1. 5.
사비니 여인 약탈 BC 89년 루키우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가 주조한 2개의 로마 공화국 데나리우스 은화. 둘 다 앞면에 사비니 왕 티투스 타티우스가 그려져 있다. 뒷면에 로마 병사에게 납치되는 사비니 여인들(위)과 사비니족에게 처벌받는 타르페이아(아래)가 그려져 있다. 사비니 여인 납치 또는 사비니 여인 유괴로도 알려진 사비니 여인 약탈(라틴어 '사비나이 랍타이')은 로마 신화에서 로마의 남자들이 지역의 다른 도시에서 젊은 여자들을 대량으로 납치한 사건이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와 르네상스 이후 시대에 화가와 조각가들의 빈번한 주제가 되었다. "약탈"이라는 단어(유사한 포르투갈어 및 다른 로맨스어에서 "랍토"는 "납치"를 의미)는 사건에 대한 고대 기록에서 사용된 라틴어 랍티오의 일반적인 번역이다. 현대 학자들은 이 단어를.. 2022. 1. 1.
고대 유럽의 부족(部族, tribe) BC 800-400년 이탈리아 철기 시대 에트루리아(지도의 주황색 영역)는 도시 국가의 집합체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그중 12개 도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리스인과 페니키아인의 공격으로부터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에트루리아 동맹을 형성하였고 때로는 도데카폴리스로 알려져 있다. 에트루리아의 지배력은 이탈리아 중서부와 베네티족(현재의 베네치아 주변)을 향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서쪽 해안을 따라 나폴리까지 뻗어 있었다. 알라리아가 코르시카 동부를 지배하여 카르타고의 페니키아인과 이탈리아 남부 및 시칠리아의 그리스인과 경계를 이루는 반원형의 영토를 완성했다. 다른 두 개의 에트루리아 동맹도 결성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남쪽의 캄파니아였으며, 카푸아 도시 국가(지금의 나폴리도 포함됨)가 이끌었다. 이 동맹은 그.. 2021. 12. 29.
BC 3500년경 시베리아와 동아시아 퉁구스어족이 아무르 강 주변에서 바이칼 호수와 시베리아로 이동한 것은 BC 3500년 경에 시작되었으며, 아마도 처음에는 잠정적으로 시작되어 적어도 다음 2천 년 또는 3천 년 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약 1,500년 전에 우랄어 사용자인 사모예드어파 무리는 반대 방향인 우랄에서 같은 이동을 시작했지만, 최초의 퉁구스어족 무리가 도착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시베리아에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자리를 잡았는지는 매우 불분명하다. 이 지역의 초기 원주민인 고시베리아인은 약간 이동하여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지만, 이 새로운 도착자들에 의해 대부분 수몰되었다. 오늘날 시베리아에 있는 베링해 해안선의 니브흐인의 경우에는 외딴곳에서 존속을 형성하고 있다. 출처 : The History Files 2021. 12. 26.
중앙아시아에서 인도 유럽인의 진행 BC 6000년경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코카커스 산맥의 북쪽 끝자락은 원시 인도 유럽인에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고향으로, 그들은 동류의 유라시아어 사용자들(후빙기 노스트라트어족의 한 갈래)과 분리되었을 것이다. 이 다른 유라시아어 사용자들은 아마도 두 바다 사이의 주요 내륙 지역을 포함하여 넓은 영토를 차지했을 것이다. BC 4000년경 인도 유럽인의 초기 팽창은 BC 4000년경에 일어났고, 한 무리는 남쪽의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향했다. 여기에서 사용된 카스피해 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동쪽 경로는 추측에 불과하며, 그들은 흑해 연안을 따라 내려오는 손쉬운 서쪽 경로를 이용했을지도 모르지만 해안선은 말과 가족이 함께 이동하고 내륙의 적대적인 사람들을 피하는 가장 안전한 이동 경로를 제공.. 2021. 12. 26.
로마의 수입품과 수출품 어느 시대에나 인구가 많았지만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도시였던 로마는 밀을 기본으로 고기, 치즈, 오일, 채소, 와인을 비롯한 엄청난 양의 일일 식량이 필요했다. 서쪽과 동쪽의 정복은 알려지지 않은 동식물의 수입을 허용했고, 그중 일부는 이탈리아 반도에 들어와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토양은 화산이 많기 때문에 흔히 용암 토양이었고 일반적으로 채소와 과일을 더 맛있게 만드는 미네랄 소금이 풍부했다. 로마는 다음과 같은 토종 식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 루핀(로마인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루핀을 먹었다), - 렌틸콩(곡물가루를 얻기 위해), 병아리콩(곡물가루와 함께 넣어서), - 누에콩(날것과 익힌 것), - 양상추, - 양배추, - 리크, - 스펠트(폴렌타용, 따라서 밀가루라는 용어), - 서곡, - 기.. 2021. 10. 7.
로마의 경제 도시화(우르베) 고대 로마는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사이의 큰 불평등의 예로 받아들여지는데, 이는 종종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당시 수도는 가능성의 나라, 그 당시의 미국이었으며 도시화 현상이 압도적으로 심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살 곳이 없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박해받거나 수배된 사람들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피신했다. 조잡하게라도 거래를 아는 사람들은 로마에서 생계를 꾸렸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나열했다. 1. 국가는 무산자에게 곡물과 의무적인 돈을 기부했다. 2. 아우구스투스 이후로는 로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땅 전체에서 가장 낮은 임대료가 국가의 책임이 되었다. 한마디로 로마는 공공주택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무료로 주었는데, 이는 오늘날에는 시행되지 않으며 무료도 저렴하지도 않다. .. 2021. 10. 1.
로마 공화국 군대 (BC 500-28년) BC 500년경 공화국 수립 당시부터 전통적인 로마 군대 대형은 그리스의 호플리테스 팔랑크스를 채택했다. 로마 시민군인의 무기 또한 그리스식이었다. 짧은 창, 둥근 방패, 투구, 갑옷, 정강이받이, 그리고 칼. 유사한 대형을 사용하는 군대와 평지에서 기존 방식의 전투를 하는 경우, 팔랑크스는 충분히 잘 작동했다. 그러나 고르지 않은 지형에서는 팔랑크스가 움직일 수 없었다. BC 340-290년 삼니움과의 전쟁에서 험준한 아펜니노 고개, 계곡, 그리고 협곡에서 싸우면서 팔랑크스는 움직임이 불가능하고 기습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거친 갈리아인과의 전쟁은 기동성이 뛰어난 갈리아 군대의 편대가 팔랑크스의 노출된 측면을 보호하는 기병을 전장에서 쫓아내면 사방에서 그들을 분쇄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 2021. 9. 29.
로마와 갈리아의 만남 이탈리아 북부에 대한 켈트족의 초기 진출은 평화로웠을지 모르지만 BC 400년 이후에는 폭력적으로 변했다. 아테나이오스의 저술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연회 동안 전쟁과 습격을 촉구하는 외침이 선포되었다. "여럿이 함께 식사를 하면 그들은 동그랗게 둘러앉지만, 가장 강하고 전쟁 실력 또는 가문 관계나 재력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람은 가운데 앉았다. 그 옆에는 집주인이 있고, 그 옆에는 각 계급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길쭉한 방패를 든 전사가 뒤에 바짝 서 있고 경호원들은 맞은편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주인처럼 잔치를 즐겼다." 아마도 켈트족 의회에도 사제들인 드루이드들이 참석했을 것이다. 그들의 신조는 이 당시에도 고대로 여겨졌고 기원은 선사 켈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서로 다른 민.. 2021. 9. 28.
로마에서 유래한 300 BC 5세기 로마 시민의 무장. 청동 투구와 둥근 방패(클리페우스), 창과 짧은 검을 장비했다. 당시 군대는 이 값비싼 장비를 살 수 있는 부유한 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BC 5세기 에트루리아의 하급 장교. 호플리테스와 유사한 투구 장식의 유형으로 구별되었다. 방패는 가죽으로 강화되어 있으며 무기는 창과 팔카타 검이었다. BC 479년 또는 477년 베이엔타네스(베이와 그 일대 에트루리아인)는 파비우스 씨족을 압도하여 거의 모든 병사를 학살했다. BC 477년 크레메라 볼스키족과 아이쿠이족에 대한 전쟁에서 로마는 적절한 병력을 지원했지만, 에트루리아 도시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베이와의 전쟁에서는 동맹군으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로마에서 북쪽으로 10 마일 떨어진 바위투성이의 고지에 위치한 .. 2021. 9. 27.
비잔틴 제국 역사 지도 - 1편 하나의 제국으로 남기까지 AD 395-408년 아르카디우스 아르카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 테오도시우스 1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아일리아 플라킬라의 장남이며 호노리우스의 형제이다. 아르카디우스는 그들의 아버지가 사망한 395년부터 제국의 동쪽을 통치했고 호노리우스는 서쪽을 통치했다. 약한 통치자였던 그의 치세는 일련의 강력한 각료들과 그의 아내인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에 의해 지배되었다. 서부 제국의 섭정 스틸리코가 동부를 장악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진격하자 알라리크 역시 반란을 일으켰다. 396년 서고트족은 아테네와 펠레폰네소스에서 약 1년간 약탈을 하고 스틸리코가 보낸 군대를 격파하고 이동했다. 스틸리코는 서고트 출신의 가이나스를 보내 동로마의 섭정 루피누스를 제거했다. 이제 권력은 환관 에우트로피우스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2021. 9. 26.
로마 제국 역사 지도 - 11편 서부 제국의 몰락 AD 395-423년 호노리우스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는 테오도시우스 1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아일리아 플라킬라의 작은 아들이자 395년부터 408년 사망할 때까지 제국의 동쪽을 통치한 아르카디우스의 형제였다.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410년, 로마는 거의 800년 만에 처음으로 약탈당했다. 서로마 제국의 기준에서도 호노리우스의 치세는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웠다. 그의 초기 통치는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어린 시절)과 장인(성인 이후)인 스틸리코의 지지를 받았다. AD 407-411년 9월경 콘스탄티누스 3세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누스는 407년 브리타니아에서 스스로를 서로마 황제라고 선언하고 갈리아에 정착한 로마의 장군이다. 그는 409년부터 411년까지 공동 황제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로.. 2021.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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