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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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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106

로마 왕국 (BC 753-509) 로마 군주제 또는 왕정 시대라고도 하는 이 시기는 BC 753년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 꼭대기에 도시를 건설한 로마 역사상 가장 초기의 시기였다. 왕들의 시대에 기록과 비문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공화국과 제국 시기에 쓰인 이 시기의 기록들은 구전에 기반을 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왕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확실한 것이 없다. BC 509년 왕을 타도하고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끝이 났다. 로마 왕국 기간 동안, 일곱 명의 왕이 로마를 통치했다. 로물루스(BC 753-716), 누마 폼필리우스(BC 715-673), 툴루스 호스틸리우스(BC 673-641), 안쿠스 마르키우스(BC 641-616),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BC 616-579), 세르비우스 툴리우스(BC 578-535) 및 타르퀴니우스 .. 2022. 8. 15.
로마 브리타니아 연대표 BC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처음으로 잉글랜드 해안선에 상륙한 때부터 AD 410년의 유명한 '자신의 방어선을 지켜라'는 편지에 이르기까지, 로마인은 400년 이상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글에서, 종종 험난한 관계의 우여곡절을 살펴본다! BC 55년 -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방문이 정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브리튼 섬에 대한 최초의 로마 군사 원정을 이끌었다. BC 54년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두 번째 원정; 다시 말하지만, 침공은 정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BC 27년 - 아우구스투스는 초대 로마 황제가 되었다. AD 43년 -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4개 군단에 브리튼을 정복하도록 명령했다. 43년 (8월) - 로마군이 에식스주 콜체스터에 있는 카투벨라우니 부족의 수도를.. 2022. 8. 3.
하드리아누스 장벽 병사들의 출신지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따라 거주하는 로마 보조병들은 로마 제국 내의 여러 속주에서 왔다. 세게두눔 요새는 로마군 보조병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 290년 동안 요새를 점유했다. 요새가 처음 지어졌을 때, 그곳에 거주하던 부대는 갈리아 벨기카(벨기에)에서 온 네르비족의 제2코호르트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랜 기간 요새에 주둔한 부대는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프랑스 동부)에서 온 링고네스족의 제4코호르트였다. 이 지도에서 하드리아누스 장벽에 군대를 제공한 속주는 빨간색으로 강조 표시되어 있다. 브리튼에서 징집된 부대는 제국의 다른 속주로 보내졌다.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따라 있는 요새들은 제국 전역의 다른 속주에서 온 보조병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아래 표는 각 요새에 주둔한 부대를 징집한 국가들.. 2022. 8. 2.
로마 군단 배치도 - "경계"와 중심 "퀸틸리 바레, 레기오네스 레데!"(Quintili Vare, legiones redde!) "퀸틸리우스 바루스, 내 군단을 돌려줘!" (토이토부르크 전투 후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중심성은 설령 그 서술이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권력이 머무는 곳' 중심에서 바로 알 수 있다. 중심에 대한 담론 분석은 비판적 전제 없이 수행될 때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주변부, 경계, 국경, "외부인", "변두리", 범위, 한계가 어떻게 중심부와 이 중심에 머무는 권력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은 어떻게 그것의 발전, 정점, 퇴폐, 쇠퇴, 심지어 붕괴까지 말할 수 있는가? 스코틀랜드에서 아라비아로, 그리고 대서양에서 코카서스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권력, 즉 중심적 위치를 수행한 로마 군대의 .. 2022. 8. 1.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를 침공하여 갈리아와 마찬가지로 로마화 하기로 결심한다. 가족극과 반란은 게르만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준다. 다음은 로마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이자 갈리아, 로마 및 유럽의 역사를 정의하는 순간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면, 이방 영토를 정복하는 것은 쉽지만 유지하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정복된 문화가 정복자들과 완전히 다를 때 더 복잡해진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로마의 장군이자 제국의 계승자인 드루수스는 BC 9년에 서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여 마그나 게르마니아에 대한 로마 통치의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게르마니아가 정복될 경우 갈리아 반군은 갈리아 전쟁 동안 가끔 그랬던 것처럼 게르만족에게 도움을 요청할 능력을 잃게 된.. 2022. 6. 23.
팍스 갈리아 - 로마 갈리아로 재건 카이사르가 내전을 일으켰고,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또 다른 내전을 시작했으며, 마침내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공격했다. 로마 전쟁 내내 갈리아는 치유됨에 따라 비교적 평화롭게 남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최초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퇴역 군인들의 재정착과 대규모 신도시 건설을 시작으로 갈리아에 대한 로마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갈리아는 대략 10년간의 잔혹한 전쟁 끝에 폐허가 되었다. 갈리아는 로마의 대규모 침공, 게르만족의 거듭된 침공, 수많은 부족 간 내전을 겪었다. 그 결과 인구의 20%가 죽거나 노예로 팔렸고, 그 외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러나 BC 50년 갈리아 부족들이 독립을 포기하고 마지막 주요 봉기가 진압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2022. 6. 2.
로마 제국 - 고대부터 15세기까지의 영토 변화 (上) 이 글은 1,790년간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시기의 로마 제국을 보여준다. 19개의 지도에는 그 시작과 끝, 그리고 대략 100년마다의 다양한 영토 확장과 축소가 포함되어 있다. 수세기 동안 지속된 팽창기(BC 338-AD 9년) 중 가운데 3개의 지도는 모두 영토 축소를 나타낸다. 이들은 가장 흥미로운 시기인 위기의 시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수세기 동안 지속된 수축기(1040-1452년)의 마지막을 제외한 모든 지도는 영토 확장을 나타내며,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더 흥미롭다. 중간의 천년기(9-1040년)에는 확장과 축소가 번갈아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BC 338년 - 시작 : 라틴동맹 정복 전승에 따르면, 로마는 BC 753년 로물루스에 의해 세워졌으며, 트로이 멸망으로부터 살아남은 아이네이아스의 .. 2022. 4. 30.
로마 제국의 유산 지도 로마 제국의 도서관, 극장, 목욕탕 국가별 로마 극장 및 원형 경기장 수 이탈리아 141개 프랑스 51개 튀니지 38개 튀르키예 36개 스페인 29개 잉글랜드 17개 이스라엘 12개 이집트 10개 스위스, 불가리아, 알제리 시리아, 요르단 9개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리비아 7개 포르투갈, 그리스 5개 웨일스, 독일, 북마케도니아 4개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3개 스코틀랜드, 키프로스 2개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세르비아, 모로코, 몰타, 레바논 1개 북유럽에서 발견된 250년 이전의 로마 주화 및 저장물 분포 로마 주화가 영국에서 발견된 곳 로마의 화폐는 금, 은, 청동, 오리칼쿰(아연이 함유된 황동), 구리 주화로 구성되었다. BC 3세기부터 로마 공화국에 도입된 이래, 제국 시대에 .. 2022. 3. 11.
로마 제국의 속주별 1인당 소득 로마 공화국의 경제는 곡물 및 와인과 같은 상품 교역을 중심으로 하는 대체로 농경이었다. 로마 경제의 국내 총생산(GDP)에 대한 추정치는 경제사학자마다 차이가 있다. 로마 제국의 1인당 소득 범위는 425달러에서 867달러 사이이다(2000년도 미국 달러 기준). 이탈리아의 1인당 GDP는 로마 제국의 나머지 속주보다 대략 50% 더 높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AD 125년 로마 제국의 속주별 1인당 소득 소득분포 상위 1.5% 가구가 전체 소득의 약 20%를 차지했다. 또 다른 20%는 인구의 약 10%에게 돌아갔는데, 이들은 엘리트가 아닌 중산층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나머지 "대다수"는 총소득의 절반 이상을 생산했지만 거의 근근이 살아가는 생활 수준이었다. AD 14년 로마 제국의 속주별 1인당 소.. 2022. 3. 10.
고대 로마를 변화시킨 여섯 내전 고대 로마는 역사 동안 많은 정복 캠페인을 벌였지만, 가장 영향을 미친 전쟁은 아마도 로마 자신과 싸운 전쟁이었을 것이다. 고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로마 제국은 전성기에 유럽 대륙의 대부분, 브리튼, 서아시아 대부분, 아프리카 북부 및 지중해의 섬들을 아우르고 있었다. 많은 외부 전투 외에도, 수많은 내전이 고대 로마 제국에 일어났다. 여기 가장 크고, 가장 파괴적인 여섯 내전이 있다. 1. 마리우스-술라의 내전 로마의 첫 내전은 정치가이자 장군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사이의 무자비한 권력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불화는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마리우스는 술라의 군사적 업적 중 하나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으며, 마침내 BC 88년에 마리우스가 술라를 제치고.. 2022. 2. 14.
시기에 따른 로마 제국의 지도 로마 제국 지도는 로마가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탈리아의 공화국 로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려진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발전했다. 오현제의 치세 동안, 로마 제국은 권력의 절정에 있었다. 로마인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적, 철학적, 의학적 토대 위에 위대한 문명을 건설했고 군사, 행정, 건축 및 법률과 같은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현대 서구 문명의 행정적, 법적 기반을 구축했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로 세워져 팽창주의 정책을 따름으로써 다른 도시국가들을 통제했다. 첫째, 이탈리아에 대한 절대 권력을 확립하고 지중해 전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군사력 면에서는 어떤 경쟁 군대보다 우수한 군사 체계를 구축했고, 회복력이 좋고 단련된 전사들인 군단병이라는 .. 2022. 1. 21.
비잔틴 제국에 대해 모를 수도 있는 10가지 비잔틴 제국은 고대 말과 중세 시대에 로마 제국의 나머지 부분이었다. 여기에 비잔틴 제국에 대해 모를지도 모르는 것들이 있다. 1. 비잔티움은 BC 657년 메가라에서 온 그리스 식민지 개척자들이 세운 고대 그리스 도시이다. 이 도시는 AD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에 의해 비잔틴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재건되었고 그를 기리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2. 비잔틴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단 것과 디저트를 사랑했다. 비잔틴 사람들은 꿀과 계피를 곁들인 쌀 푸딩을 즐겨 먹었다. 3. 비잔티온은 메가라의 식민지 개척 지도자이자 도시의 설립자인 비자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비잔티움"의 형태는 그리스어 비잔티온을 라틴어로 표기한 것이다. 4. 거의 200년에 이르는 가장 긴 비잔틴 .. 2022. 1. 9.
AD 43-425년 로마 브리타니아 AD 43년 로마인은 시즌 후반에 군대를 3개(그중 하나는 브리튼인의 허를 찌르기 위한 속임수였을 수도 있음)로 나누어 도착했다. 그들은 켄트의 리치보로와 웨스트서식스의 치체스터에 상륙했고, 처음에는 싸울 상대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브리튼인은 매우 현명하게 언덕과 습지로 이동하여 로마군이 보급품을 다 소모하길 바라며 시야에 띄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로마군은 카투벨라우니의 토고둠누스와 그의 형제 카라타쿠스를 상대로 승리를 기록했고, 카라타쿠스에 대한 승리는 아마도 켄트에서였을 것이다. 도분니의 구성원들은 (아마도 사절을 통해) 즉시 항복했고, 카투벨라우니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투벨라우니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들은 아마도 켄트의 메드웨이 강에서 로마군을 만나 비.. 2022. 1. 5.
사비니 여인 약탈 BC 89년 루키우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가 주조한 2개의 로마 공화국 데나리우스 은화. 둘 다 앞면에 사비니 왕 티투스 타티우스가 그려져 있다. 뒷면에 로마 병사에게 납치되는 사비니 여인들(위)과 사비니족에게 처벌받는 타르페이아(아래)가 그려져 있다. 사비니 여인 납치 또는 사비니 여인 유괴로도 알려진 사비니 여인 약탈(라틴어 '사비나이 랍타이')은 로마 신화에서 로마의 남자들이 지역의 다른 도시에서 젊은 여자들을 대량으로 납치한 사건이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와 르네상스 이후 시대에 화가와 조각가들의 빈번한 주제가 되었다. "약탈"이라는 단어(유사한 포르투갈어 및 다른 로맨스어에서 "랍토"는 "납치"를 의미)는 사건에 대한 고대 기록에서 사용된 라틴어 랍티오의 일반적인 번역이다. 현대 학자들은 이 단어를.. 2022. 1. 1.
비잔틴 제국 역사 지도 - 7편 마케도니아 왕조 (867-976년) 867-886년 바실레이오스 1세 마케돈 마케도니아인으로 불렸던 바실레이오스 1세는 마케도니아 테마의 소박한 소작농으로 태어나 제국 궁정에서 출세했다. 그는 미하일 3세의 친척인 테오필리체스를 섬겼고 부유한 다니엘리스에게서 재산을 받았다. 그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결혼하여 미하일 3세의 신임을 얻었고 866년에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다음 해에 미하일의 암살을 명령했다. 미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국정 운영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그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창시자였다. 그가 사망한 후 아들(아마도 미하일 3세의 친아들) 레온 6세가 계승했다. 867년-879년 9월 3일 콘스탄티노스 콘스탄티노스의 혈통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바실레이오스 1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또는 두 번째 부.. 202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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