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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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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이야기173

고대 로마의 주택 절정기에 고대 로마 제국은 모든 계층의 시민을 수용하는 시끄럽고 분주하며 번잡한 도시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집은 어땠을까? 주거 여건은 재정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부유한 로마인이 크고 널찍한 빌라에 머무는 동안 사회의 가장 가난한 구성원들은 어둡고 위험하며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내몰렸다. 놀랍도록 잘 보존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유적은 고대 로마인이 살았던 방식에 대한 훌륭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고고학자들은 또한 옛 로마 제국 전역에서 덜 손상된 주택 유적을 연구해 왔다. 그들은 고대 로마인에게 주택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생생한 역사적 그림을 정리했다. 고대 로마의 도심과 주변 시골 지역을 지배했던 다양한 주택 유형을 알아보자. 1. 도무스 고대 로마의 도시 내에서 황제 및 귀족과 같은.. 2023. 1. 3.
로마 노예의 일상 로마의 노예제도는 로마 사회에서 매우 중요했고 노예들은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했다. 사회 밑바닥에 있더라도, 그들의 일상은 동질적이지 않았다. 로마 노예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의 고향에서 벗어나 뿔뿔이 흩어져 로마인 아래에서 순종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노동에 지친 죄수와 사슬에 매인 포로를 상상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주인에게 소중히 여겨진 노예들은 그들을 둘러싼 일부 자유 로마인보다 삶의 질이 더 높았다. 하지만 이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로마 노예의 대조적인 역할 로마 노예들, 세르비(servi, 노예를 지칭하는 세르부스/servus의 복수형)는 정복당한 부족들의 생존자이자 전쟁 포로였다. 죄수들과 해적들은 다른 이들처럼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노예들은 사거나 .. 2023. 1. 1.
제9군단 - 잃어버린 로마 군단 사라진 로마의 제9군단이 런던에서 전멸했을까? 지난해 발간된 책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5,500명의 병사들이 브리튼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요크에서 남쪽으로 보내진 후 학살되었음을 암시한다. · 군단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AD 1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요크의 게이트웨이에 있다. · 그들은 AD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침공으로 브리튼에 도래했다. ·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론은 사이먼 엘리엇 박사가 발간한 책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 그는 그 병사들이 지금의 스코틀랜드에서 기습을 받아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태어난 지 43년 후에 영국 해안을 습격하여 요크 도시를 건설한 후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침공과 함께 이 해안에 온 로마 제9군단에게 일.. 2022. 12. 27.
로마 제국 - 야만인의 침공 제국의 서부가 약화되다 서로마 제국은 더 약하고 가난한 절반이었다. 410년, 알라리크와 야만인 집단 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했다. 로마가 외국 군대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보다 800년 앞선 초기 공화정 시대의 갈리아인 이래 처음이었다. 국경을 지킬 수 없게 된 서로마 제국은 많은 야만인에게 짓밟혔다. 451년, 아마 모든 야만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훈족의 아틸라는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에서 벌어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로마군과 서고트족에게 패했다. 대부분의 야만인이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훈족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야만인 집단 중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카탈라우눔의 로마군 지도자는 아틸라의 어린 시절 친구인 아이티우스였다. 아이티우스는 어린 시절의 일부를 훈족의 야만적인 진영에서 인질로 지내며 보.. 2022. 11. 29.
로마 제국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황제가 되었다. 그는 로마가 필요로 하는 것, 안정과 내전의 종식, 실업자들을 위한 일자리를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주었고, 그는 어떤 왕이나 독재자 못지않게 강력했지만, 원로원이 로마 제국의 많은 부분을 통치하도록 허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나는 로마를 벽돌의 도시로 발견하고 대리석의 도시로 남겼다"라고 말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를 재건하고 미화하여 많은 실직 로마인들을 그 과정에서 일하게 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대제국을 통치했다. 그가 이 거대한 제국을 통해 이룬 평화는 무역과 번영의 증가로 이어졌다. 그는 라틴어와 로마 문화를 전파했다. 제국 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아우.. 2022. 11. 28.
로마 공화정의 종식 -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그들이 로마 공화국을 구했기를 희망했다. 3월 15일, 그들은 카이사르의 절친한 친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도 죽이는 것을 고려했지만, 그를 위협으로 보지도 않았고 도살자로 등장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목표는 카이사르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제 안토니우스는 기회를 보아 로마의 군중에게 카이사르의 예복을 보여주며, 각각의 단검이 찌른 곳을 드러냈다. 카이사르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를 죽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도주했다. 놀랍게도 카이사르의 종손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재산 대부분을 물려받았다. 당시 19세였던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재산을 주장하기 위해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항해했다. 아무도, 특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를 권력을 장악할 위협으로 보지 않.. 2022. 11. 27.
로마 공화정 후기 그라쿠스 형제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병사들이 타국 전쟁에서 돌아와 그들이 떠나 있는 동안 농장이 부유한 로마인들에게 팔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더 이상 농장을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판매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인 것 같았다. 새로운 소유주들은 이 작은 농장들을 합쳐서 노예들이 일하는 "대농장"을 만들었다. 그래서 병사들이 그들의 땅을 잃을 정도로 나쁘지만 않다면, 새로운 소유주들은 그들이 땅을 경작한다고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수천 명에 달하는 실직 퇴역 병사들이 일자리를 찾아 로마 거리로 몰려들었다. 한때 자랑스러웠던 로마인의 대부분은 이제 정부의 지원금으로 존재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부유한 평민이었다. 티베리우스는 무엇보다도 오래.. 2022. 11. 26.
제3차 포에니 전쟁 (BC 149-146) 대 카토. 그는 그리스 문화를 경멸했고, 카르타고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한 후 그렇게 잘 해낸 것에 화가 났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했다.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의 작은 지역으로 축소되었고, 반면 로마는 카르타고의 많은 영토, 특히 이베리아(스페인)를 차지함으로써 확장되었다. 이제 로마는 역사상 처음으로 병사들이 오랫동안 전장으로 멀리 나가 있어야 했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카르타고와의 평화가 이루어진 지금, 고국으로 돌아가는 이 병사들은 어떻게 되는가? 대부분은 농부였지만, 그들이 없는 동안 부유한 로마인들은 농장을 사들이고 노예를 이용하여 농장을 운영했다. 돌아온 참전용사들은 갈 곳도 일거리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아 로마로 몰려들었다. 이는 로마의 "승리를 거둔.. 2022. 11. 25.
제2차 포에니 전쟁 (BC 218-201) 용병 전쟁 (BC 240-237년) 카르타고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에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용병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했다. 로마는 전쟁 후 카르타고에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강요했고, 그래서 카르타고는 용병들에게 지불할 돈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용병들과 카르타고 사이의 지불에 대한 의견 불일치는 용병 전쟁으로 이어졌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위대한 카르타고 지도자인 하밀카르 바르카는 이제 아프리카로 돌아와 시칠리아에서 로마에 맞서 싸운 자신의 군대 일부였던 용병들과 싸웠다. 하밀카르는 성공했지만, 카르타고가 용병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로마는 코르시카 섬과 사르데냐 섬을 장악할 기회를 잡았다. 이는 카르타고의 주요 무역로 중 일부를 차단했고, 카르타고는 제국에 추가할 새로운 땅을 찾아야 했다. .. 2022. 11. 24.
제1차 포에니 전쟁 (BC 264-241)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분쟁이었다. 이는 BC 264년에 시작되어 241년까지 끝나지 않은 긴 전쟁이었다. 분쟁의 대부분은 시칠리아 섬이나 시칠리아를 둘러싼 바다에서 일어났다. 한때 로마는 카르타고와 매우 가까운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영토를 공격했다. 이 원정은 크산티포스라는 스파르타인이 카르타고 군대를 이끌고 그들의 조국을 방어했기 때문에 성공적이지 못했다. 카르타고는 원래 BC 800년경 페니키아인에 의해 정착되었다. 페니키아의 도시국가인 티레 출신의 디도 공주는 북아프리카 해안에 이 도시를 세웠다. 페니키아인은 주로 유리, 상아 조각품, 그리고 그들의 유명한 자주색 옷을 거래하는 위대한 선원이자 무역상이었다. 포에니("페니키아인, 티레의 보라색/진홍색"을 뜻하는 그리스어 '포이니키.. 2022. 11. 23.
로마 - 공화정 초기의 확장 공화정 치하의 로마 BC 509년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로마에서 쫓겨난 후, 왕은 환영받지 못했다. 이제 로마인은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형태의 정부는 "공공의 이익"을 의미하는 공화정으로 알려져 있다. 공화정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대신해 결정을 내릴 대표자들을 선출한다. 미국은 공화정이다. 고대 로마 공화정에는 3개의 기관이 있었다. 처음에 입법부는 원로원으로, 로마에서 가장 오래되고 부유한 가문인 로마의 파트리키(귀족) 계급 시민 300명으로 구성된 단체였다. 왕에게 복종하는 것에 지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내쫓았다. 원로원은 로마 공화정의 가장 강력한 기관이었고, 원로원 의원은 종신직이었다. 행정부는 매년 선출되는 두 명의 콘술(집정관)로 구성되었.. 2022. 11. 22.
로마의 시작 - 군주제 아래의 로마 로마는 그리스 반도의 바로 서쪽에 있는 이탈리아 반도의 테베레 강 유역을 따라 있는 라티움 평원에 위치하고 있다. 친절한 양치기 파우스탈루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발견하고 그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그와 그의 아내는 그들을 자신들의 자식으로 키운다. 이 아이들은 원래 테베레 강에 버려져 암늑대의 보살핌을 받았다. 로마의 전설적인 건국 로마는 작은 농촌 마을로 시작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커다란 고대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트로이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로마의 건국에 관한 전설이 있다. 알다시피, 그리스인은 목마의 속임수를 사용하여 트로이인을 물리쳤다. 트로이는 멸망했지만,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의 재물 일부와 피난민 무리를 이끌고 탈출했다. 아이네이아스와 난민들은 지중해를 떠돌다가.. 2022. 11. 19.
로마인이 수도교를 건축한 방법 로마 수도교는 고대 세계의 가장 훌륭한 유산 중 하나이다. 한때 로마 제국 전역의 도시에 중요한 수로였던 이들은 식수, 목욕, 농업을 위해 담수를 공급했다. 많은 로마 수도교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일부는 여전히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어, 이는 수천 년 전에 건설된 수도교의 내구력을 증명한다. 로마인이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건축 도구와 자원 없이 어떻게 그렇게 거대하고 복잡한 건축물을 지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이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짓기 위해 그들이 사용한 몇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1. 중력을 염두에 두고 건설된 로마 수도교 물이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도록 로마인들은 호수와 샘으로부터 아래로 경사진 수로를 설계하여 중력이 .. 2022. 9. 16.
야만족의 대이동 서로마 제국으로의 대이동... AD 395년 야만인의 침공 로마 제국 이 지도는 395년 로마 제국의 대략적인 국경을 보여준다. 2세기 초부터 거의 그대로 유지되어 온 방어선은 하드리아누스 장벽, 라인 강과 다뉴브 강, 사하라 사막이다. 페르시아와 끊임없이 분쟁을 벌이던 동방의 경계는 항상 다른 곳보다 조금 더 변동되었다. 이러한 방어선은 이제 곧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훈 4세기 후반과 5세기에 서로마 제국으로의 대이동을 촉발한 것은 훈족이었다. 그들은 유라시아의 넓은 지역에 퍼진 중앙아시아 부족의 연합체였다. 그들은 아틸라 통치(434-453년) 하에서 동유럽의 넓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지만, 로마 제국 내에는 많은 수가 정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 역사의 변두리에 머물렀다. 그들은 제국을.. 2022. 9. 9.
로마 제국 연대표 BC 27년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되어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다 BC 25년 갈라티아가 로마 속주로 합병되다 BC 23년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마르켈루스가 사망하다 BC 19년 칸타브리족과 아스투레스족이 평정되어 칸타브리아 전쟁(BC 29-19년)이 끝나다 BC 16년 라이티아와 노리쿰이 정복되어 속주로 병합되다 BC 12년 M.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사망하다 드루수스가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마니아 원정(BC 12-9년)을 시작하다 BC 9년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에서 캠페인 중 말에서 낙마하여 사망하다 판노니아 또한 병합되어 일리리쿰 속주에 통합되다 BC 2년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가 간통죄와 반역죄로 유죄 선고를 받고 유배되다 AD 2년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마실리아(마르세유)에서 급병으로 사망하다 4년..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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