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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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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이야기178

역대 로마 황제 (BC 27-AD 476) - 1편 팍스 로마나 (Pax Romana) 원수정 시대 BC 27-AD 284년 율리우스-클라우디스 왕조 (BC 27-AD 68년) 초대 아우구스투스 이름 :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재위 : BC 27년 1월 16일-AD 14년 8월 19일 (40년 7개월 3일)출생 : BC 63년 9월 23일 로마,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사망 : 14년 8월 19일 놀라, 자연사, 76세 2대 티베리우스 이름 :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재위 : 14년 9월 17일-37년 3월 16일 (22년 5개월 27일)출생 : BC 42년 11월 16일 로마,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사망 : 37년 3월 16일 미세눔, 자연사, 77세 3대 칼리굴라 이름 :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티베리우스의 종손재위 : 37년 3월 18.. 2023. 5. 13.
고대 로마인이 구글맵을 가지고 있었다면 옴네스 비아이(Omnes Viae)는 로마 제국의 도로를 기반으로 한 현대적인 루트 플래너이다. 로마인이 자신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었던 이 루트 플래너를 활용하여 로마 제국을 횡단하는 도로 여행을 계획해 보자. (출처 - 옴네스비아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로마인은 스크롤에 능숙했다. 다만 그들은 실제로 다루기 힘든 스크롤(두루마리)을 사용했지만. 그들은 로마 도로만을 위한 편리한 온라인 루트 플래너인 옴네스 비아이를 좋아했을 것이다. 편리하지만 제국을 횡단하는 것은 여전히 250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오르텔리우스의 유명한 1598년판 포이팅거 지도, 각각 두 부분으로 된 네 장의 다채로운 시트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 RareMaps.com / 퍼블릭 도메인) BC 20년, .. 2023. 5. 6.
로마의 대외 전쟁 및 전투 1편 - BC 8-6세기 BC 8세기· 사비니 전쟁 (사비니 여인 약탈) · 카메리움(Camerium) 정복 - 로물루스가 최초로 복속시켰고, 5대 왕 대 타르퀴니우스가 재정복했다. 502년에 일으킨 봉기 이후 파괴되었다 · 피데나이(Fidenae) 및 베이(Veii) 전쟁 - 에트루리아인의 도시 피데나이를 로물루스가 점령한 뒤, 인근의 에트루리아 도시 베이가 영토에 침입하자 로마군이 그들을 추격하여 베이 도시 앞에서 격파했다. 도시를 차지할 힘이 부족한 로마가 그 땅을 황폐화하자 베이인은 화평을 제안하고 영토의 일부를 대가로 조약을 맺었다  BC 7세기· 제2차 피데나이 및 베이 전쟁 - 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치세에 피데나이인이 봉기하여 베이의 군대와 함께 전쟁을 일으켰다. 알바 롱가를 복속시킨 툴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 2023. 5. 4.
로마의 기어 : 고대 로마 원로원 의원의 하루 로마 원로원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기관 중 하나였다. 원로원은 로마의 시초에 세워졌고, 로마 군주제의 몰락, 로마 공화정의 몰락, 제국의 분열, 그리고 476년 서로마 제국의 몰락에서도 살아남았다. 공화정 기간 동안 권력의 상승을 달성했고 중세 초기에 마침내 약화되었다. 이 글에서, 로마 공화정 시대로부터 원로원 의원의 삶에서 매혹적인 하루를 탐구할 것이다.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무엇을 했는가?원로원은 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원로원이라는 단어가 라틴어(세넥스/Senex)로 "노인"을 의미하는 이유이다. 로마 원로원의 주요 기능은 법령을 논의하고 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는데, 모두 원로원의 콘술(집정관)이나 지도자들이 승인하거나 거부(라틴어 베토/Veto)할 수 있었다.뿐만 아니라 로마.. 2023. 4. 5.
중세 로마 제국 - 비잔틴 제국을 형성한 5대 전투 636년 야르무크에서 일어난 재앙 이후, 동로마 제국으로도 알려진 비잔틴 제국은 아랍 침공군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8세기 초까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북아프리카의 부유한 속주들은 영원히 사라졌다. 제국군이 완전히 물러나자 아랍군은 제국의 심장부인 아나톨리아로 이동했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두 번의 포위전을 겪었지만 난공불락의 성벽 덕에 구해졌다. 서방에서는 다뉴브 국경이 무너져 불가르인이 발칸반도에서 그들의 왕국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비잔틴은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9세기와 10세기 사이에 반격을 가하며 규모를 두 배로 늘렸다. 제국 행정의 군사화, 군대의 재편, 그리고 노련한 외교는 강력한 중세 국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적을 물리칠 때마다 셀주크, 노르만, 베네치아, 오스.. 2023. 1. 11.
고대 로마의 주택 절정기에 고대 로마 제국은 모든 계층의 시민을 수용하는 시끄럽고 분주하며 번잡한 도시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집은 어땠을까? 주거 여건은 재정 상태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부유한 로마인이 크고 널찍한 빌라에 머무는 동안 사회의 가장 가난한 구성원들은 어둡고 위험하며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내몰렸다. 놀랍도록 잘 보존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유적은 고대 로마인이 살았던 방식에 대한 훌륭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고고학자들은 또한 옛 로마 제국 전역에서 덜 손상된 주택 유적을 연구해 왔다. 그들은 고대 로마인에게 주택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생생한 역사적 그림을 정리했다. 고대 로마의 도심과 주변 시골 지역을 지배했던 다양한 주택 유형을 알아보자.1. 도무스고대 로마의 도시 내에서 황제 및 귀족과 같은 가.. 2023. 1. 3.
로마 노예의 일상 로마의 노예제도는 로마 사회에서 매우 중요했고 노예들은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했다. 사회 밑바닥에 있더라도, 그들의 일상은 동질적이지 않았다. 로마 노예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의 고향에서 벗어나 뿔뿔이 흩어져 로마인 아래에서 순종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노동에 지친 죄수와 사슬에 매인 포로를 상상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주인에게 소중히 여겨진 노예들은 그들을 둘러싼 일부 자유 로마인보다 삶의 질이 더 높았다. 하지만 이들은 누구였는가?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로마 노예의 대조적인 역할로마 노예들, 세르비(servi, 노예를 지칭하는 세르부스/servus의 복수형)는 정복당한 부족들의 생존자이자 전쟁 포로였다. 죄수들과 해적들은 다른 이들처럼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노예들은 사거나 팔거.. 2023. 1. 1.
제9군단 - 잃어버린 로마 군단 사라진 로마의 제9군단이 런던에서 전멸했을까? 지난해 발간된 책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5,500명의 병사들이 브리튼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요크에서 남쪽으로 보내진 후 학살되었음을 암시한다. · 군단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AD 1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요크의 게이트웨이에 있다. · 그들은 AD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침공으로 브리튼에 도래했다. ·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론은 사이먼 엘리엇 박사가 발간한 책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 그는 그 병사들이 지금의 스코틀랜드에서 기습을 받아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태어난 지 43년 후에 영국 해안을 습격하여 요크 도시를 건설한 후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침공과 함께 이 해안에 온 로마 제9군단에게 일.. 2022. 12. 27.
로마 제국 - 야만인의 침공 제국의 서부가 약화되다서로마 제국은 더 약하고 가난한 절반이었다. 410년, 알라리크와 야만인 집단 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했다. 로마가 외국 군대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보다 800년 앞선 초기 공화정 시대의 갈리아인 이래 처음이었다. 국경을 지킬 수 없게 된 서로마 제국은 많은 야만인에게 짓밟혔다.451년, 아마 모든 야만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훈족의 아틸라는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에서 벌어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로마군과 서고트족에게 패했다. 대부분의 야만인이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훈족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야만인 집단 중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카탈라우눔의 로마군 지도자는 아틸라의 어린 시절 친구인 아이티우스였다. 아이티우스는 어린 시절의 일부를 훈족의 야만적인 진영에서 인질로 지내며 보냈다.. 2022. 11. 29.
로마 제국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황제가 되었다. 그는 로마가 필요로 하는 것, 안정과 내전의 종식, 실업자들을 위한 일자리를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주었고, 그는 어떤 왕이나 독재자 못지않게 강력했지만, 원로원이 로마 제국의 많은 부분을 통치하도록 허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나는 로마를 벽돌의 도시로 발견하고 대리석의 도시로 남겼다"라고 말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를 재건하고 미화하여 많은 실직 로마인들을 그 과정에서 일하게 했다.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대제국을 통치했다. 그가 이 거대한 제국을 통해 이룬 평화는 무역과 번영의 증가로 이어졌다. 그는 라틴어와 로마 문화를 전파했다. 제국 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아우구.. 2022. 11. 28.
로마 공화정의 종식 -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그들이 로마 공화국을 구했기를 희망했다. 3월 15일, 그들은 카이사르의 절친한 친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도 죽이는 것을 고려했지만, 그를 위협으로 보지도 않았고 도살자로 등장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목표는 카이사르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제 안토니우스는 기회를 보아 로마의 군중에게 카이사르의 예복을 보여주며, 각각의 단검이 찌른 곳을 드러냈다. 카이사르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를 죽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도주했다.놀랍게도 카이사르의 종손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재산 대부분을 물려받았다. 당시 19세였던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재산을 주장하기 위해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항해했다. 아무도, 특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를 권력을 장악할 위협으로 보지 않았.. 2022. 11. 27.
로마 공화정 후기 그라쿠스 형제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병사들이 타국 전쟁에서 돌아와 그들이 떠나 있는 동안 농장이 부유한 로마인들에게 팔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더 이상 농장을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판매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인 것 같았다. 새로운 소유주들은 이 작은 농장들을 합쳐서 노예들이 일하는 "대농장"을 만들었다. 그래서 병사들이 그들의 땅을 잃을 정도로 나쁘지만 않다면, 새로운 소유주들은 그들이 땅을 경작한다고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수천 명에 달하는 실직 퇴역 병사들이 일자리를 찾아 로마 거리로 몰려들었다. 한때 자랑스러웠던 로마인의 대부분은 이제 정부의 지원금으로 존재했다.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부유한 평민이었다. 티베리우스는 무엇보다도 오래된 .. 2022. 11. 26.
제3차 포에니 전쟁 (BC 149-146) 대 카토. 그는 그리스 문화를 경멸했고, 카르타고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한 후 그렇게 잘 해낸 것에 화가 났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했다.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의 작은 지역으로 축소되었고, 반면 로마는 카르타고의 많은 영토, 특히 이베리아(스페인)를 차지함으로써 확장되었다.이제 로마는 역사상 처음으로 병사들이 오랫동안 전장으로 멀리 나가 있어야 했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카르타고와의 평화가 이루어진 지금, 고국으로 돌아가는 이 병사들은 어떻게 되는가? 대부분은 농부였지만, 그들이 없는 동안 부유한 로마인들은 농장을 사들이고 노예를 이용하여 농장을 운영했다. 돌아온 참전용사들은 갈 곳도 일거리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아 로마로 몰려들었다. 이는 로마의 "승리를 거둔 .. 2022. 11. 25.
제2차 포에니 전쟁 (BC 218-201) 용병 전쟁 (BC 240-237년)카르타고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에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용병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했다. 로마는 전쟁 후 카르타고에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강요했고, 그래서 카르타고는 용병들에게 지불할 돈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용병들과 카르타고 사이의 지불에 대한 의견 불일치는 용병 전쟁으로 이어졌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위대한 카르타고 지도자인 하밀카르 바르카는 이제 아프리카로 돌아와 시칠리아에서 로마에 맞서 싸운 자신의 군대 일부였던 용병들과 싸웠다. 하밀카르는 성공했지만, 카르타고가 용병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로마는 코르시카 섬과 사르데냐 섬을 장악할 기회를 잡았다. 이는 카르타고의 주요 무역로 중 일부를 차단했고, 카르타고는 제국에 추가할 새로운 땅을 찾아야 했다. 로.. 2022. 11. 24.
제1차 포에니 전쟁 (BC 264-241)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분쟁이었다. 이는 BC 264년에 시작되어 241년까지 끝나지 않은 긴 전쟁이었다. 분쟁의 대부분은 시칠리아 섬이나 시칠리아를 둘러싼 바다에서 일어났다. 한때 로마는 카르타고와 매우 가까운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영토를 공격했다. 이 원정은 크산티포스라는 스파르타인이 카르타고 군대를 이끌고 그들의 조국을 방어했기 때문에 성공적이지 못했다. 카르타고는 원래 BC 800년경 페니키아인에 의해 정착되었다. 페니키아의 도시국가인 티레 출신의 디도 공주는 북아프리카 해안에 이 도시를 세웠다. 페니키아인은 주로 유리, 상아 조각품, 그리고 그들의 유명한 자주색 옷을 거래하는 위대한 선원이자 무역상이었다. 포에니("페니키아인, 티레의 보라색/진홍색"을 뜻하는 그리스어 '포이니키.. 202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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