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분류 전체보기905 신바빌로니아 제국 아시리아 제국의 쇠퇴 아시리아 제국의 마지막 30년에 대해 남아있는 역사적 자료는 거의 없다. BC 640년 이후 아슈르바니팔에 대한 비문은 현존하지 않으며, 그의 후계자들이 남긴 소수의 비문에는 정치적 문제에 대한 모호한 암시를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연대기가 재개되는 BC 625년까지 거의 완전한 침묵이 지속되었다. 아시리아 제국의 급속한 몰락은 이전에는 군사적 패배 때문이라고 여겨졌지만, 메디아와 바빌로니아만이 어떻게 이 일을 성취할 수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보다 최근의 연구에서 635년 이후 내전이 일어나 제국을 약화시켰으며 더 이상 외부의 적에 대항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아슈르바니팔은 쌍둥이 아들을 두었다. 아슈르에텔일라니가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지만 그의 쌍.. 2021. 11. 25. 성서 속의 전투 구약성서에서 전쟁은 인간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로 나온다.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항상 신성시되었다. 이스라엘이 의로운 전쟁을 할 때마다 싸운 것은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 드보라의 승리 찬가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좋은 예를 보여준다. 또한 사무엘 상에서 블레셋과의 전쟁에 들고나간 언약궤에 대한 이야기는 성전에 대한 생각과 관련이 있다. 반대로 전쟁에서 패했을 때 지는 존재는 결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다. 이런 경우에 이스라엘과 그 왕들은 주의 뜻을 어겼고 그에 따라 전쟁에서 패하는 벌을 받았다. 전쟁은 포로들의 대량 처형과 적, 남성, 여성, 아이들의 완전한 몰살을 포함하는 등 잔인했다. 히브리어 전문 용어 헤렘(herem)은 적에게 부과된 하나님의 금기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에 패배.. 2021. 11. 22. 혼네와 다테마에 - 일본에서 관계 유지의 복잡성 혼네와 다테마에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일본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고 혼네와 다테마에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인이 얼마나 화합을 유지하고 대립을 피하려고 노력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혼네와 다테마에는 외국인들이 가장 당혹해하는 개념 중 하나이다. 혼네(本音)는 문자 그대로 "진정한 목소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사람의 진실된 감정, 의견, 욕망을 의미한다. 다테마에(建前)는 "앞면 또는 외관"을 의미하며 공개적으로 보여야 하는 의견과 모습을 나타낸다. 혼네와 다테마에는 진정한 얼굴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쓴 가면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사람들 모두가 인생에서 혼네와 다테마에를 어느 정도 보여주는데,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잘 모르는 사람들과.. 2021. 11. 16. 갈리아의 그리스 제국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은 오늘날 마르세유, 마살리아 주변의 갈리아 남부에 제국을 건설했다. 오늘은 그리스 해운 제국의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프랑스 남부 해안으로 이식된 프랑스 역사에서 흥미로운 사건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BC 800년 그리스 도시 국가 포카이아에서 시작된다. 포카이아는 터키의 아시아 지역으로 불리는 곳으로 아나톨리아의 서부 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터키의 북쪽 끝과 남쪽 끝의 중간쯤에 있다. 그 당시 아나톨리아 서부에는 에게 해를 누비며 건너온 그리스인이 거의 대부분 거주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히타이트와 같은 강력한 제국들이 생겨났지만, 아나톨리아 해안 동쪽의 제국들 대부분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부에 주목했고, 그 당시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그리스인에게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2021. 11. 15. 켈트족 켈트족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그들의 문화, 종교, 예술을 프랑스로 가져왔다. 오늘의 에피소드는 최초로 기록된 프랑스 거주민인 켈트족에 관한 것이다. 역사가들은 여전히 켈트족이 누구인지에 대해 논쟁하고 있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켈트어가 한때 유럽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였다는 것이다. 켈트족은 BC 1000년경 사방으로 이주한 오늘날의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집단으로 시작되었다. 이들 민족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영국 제도, 프랑스, 이탈리아 북부, 그리고 스위스, 독일 서부 및 저지대 나라(벨기에, 네덜란드)에 거주했다. 이전의 학자들은 켈트족이 이베리아 반도와 동유럽을 가로질러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에서 루마니아 그리고 심지어 터키에 이르는 땅에 거주했다고 주장했지만, 최근의 연구는 이에 대해.. 2021. 11. 14. 프랑크의 전쟁 방식 보병 또는 기병? 일반적으로 (고트족 및 반달족과 같은 동부 게르만 부족과는 달리) 프랑크족, 알라만니족, 부르군트족, 그리고 다른 서부 게르만족은 기병보다는 주로 보병으로 싸웠다는 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잠시 동안 우크라이나의 초원지대에서 살았던 많은 동부 게르만족은 좋은 말 떼를 기르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공간과 목초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5세기 초 동고트족과 같은 일부 부족이 훈족을 따라 헝가리 평원으로 들어갔을 때도 남아있었다. 그들이 살았던 탁 트인 공간 또한 필수적으로 말에 타는 이동성을 매우 중요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라인 강 동쪽 기슭의 숲이 우거진 구릉지가 비교적 많이 있는 곳에 살았던 서부 .. 2021. 11. 12. 동고트족 (Ostrogothi) 동고트족은 "떠오르는 태양의 고트족," 또는 "떠오르는 태양에 의해 찬미된 고트족," 또는 단순히 "동고트족"을 의미하는 야만인으로, 후기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마 작가들에 의해 1세기 초에 확인된 동고트족은 처음에는 서고트족을 포함하는 더 커다란 고트족의 일부였다. 3세기 동안 고트족이 로마 제국과 접촉했고, 종종 폭력적이기도 했다. 제국에 패배하여 더 나은 관계로 발전한 고트족은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나뉘어 그들의 이후 역사는 갈라지게 된다. 서고트족뿐만 아니라 동고트족에게도 4세기와 5세기의 역사는 훈족의 이동과 훈족의 위대한 아틸라 제국의 흥망성쇠에 의해 형성되었다. 5세기에 재건된 동고트 부족은 왕이 이끄는 강력한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이들 왕 중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 2021. 11. 11. 비잔틴 제국 역사 지도 - 7편 마케도니아 왕조 (867-976년) 867-886년 바실레이오스 1세 마케돈 마케도니아인으로 불렸던 바실레이오스 1세는 마케도니아 테마의 소박한 소작농으로 태어나 제국 궁정에서 출세했다. 그는 미하일 3세의 친척인 테오필리체스를 섬겼고 부유한 다니엘리스에게서 재산을 받았다. 그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결혼하여 미하일 3세의 신임을 얻었고 866년에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다음 해에 미하일의 암살을 명령했다. 미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국정 운영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그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창시자였다. 그가 사망한 후 아들(아마도 미하일 3세의 친아들) 레온 6세가 계승했다. 867년-879년 9월 3일 콘스탄티노스 콘스탄티노스의 혈통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바실레이오스 1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또는 두 번째 부.. 2021. 11. 10. 테오도리쿠스 대왕 (451년경 또는 453/454-526년) 523년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테오도리쿠스의 제국, 분홍색으로 표시된 영토는 테오도리쿠스가 직접 통치하였고 점묘법으로 된 지역은 그의 패권 아래에 있었다. 가장 위대한 야만인 왕 중 하나이자 고트족의 가장 위대한 왕인 테오도리쿠스 대왕 또는 그의 본명인 아말은 471년부터 526년까지 동고트족을 통치했으며 493년부터 526년까지 이탈리아 고트 왕국을 통치했다. 그는 라이벌 야만인 왕 오도아케르/오도바카르를 물리치고 이탈리아에서 권력을 잡았고, 테오도리쿠스의 통치는 일반적으로 효율성과 관용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의 백성과 로마 토착민 사이의 관계를 능숙하게 관리했으며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종교의 중요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 동고트족과 로마인 사이의 평화를 유지할 수.. 2021. 11. 9. 클로도베쿠스/클로비스와 레미기우스 클로도베쿠스/클로비스 1세(생애 466년경-511년) 메로베우스/메로빙거 왕조 중 가장 중요한 왕인 클로도베쿠스 1세는 프랑크족의 통합자이자 갈리아 대부분의 정복자이며 메로베우스 왕조 치하의 프랑크 왕국 창시자였다. 그는 또한 프랑크의 첫 번째 기독교 왕이었다. 그는 놀랄 만큼 무자비하고 잔인하며 부도덕하다는 평판을 갖고 있다. 481년 그의 아버지 킬데리쿠스 1세가 사망하자, 클로도베쿠스는 오늘날 벨기에의 투르네 주변에 정착한 살리 프랑크족의 족장을 계승했다. 그는 486년 갈리아 북부의 통치자인 시아그리우스를 무찌르면서 정복을 시작했다. 이 승리는 클로도베쿠스를 루아르 강 북쪽 갈리아(나중의 네우스트리아)의 주인으로 만들었고, 그는 프랑크 측근들과 함께 수도를 수아송으로 옮겼다. 클로도베쿠스의 나머지.. 2021. 11. 7. 부이예 전투 프랑스의 탄생 날짜 - 507년 봄 위치 - 아키텐 푸아티에 북서쪽 15 km(9 마일) 부이예 역사적 배경 서유럽에서 5세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발전은 이미 서로마 제국의 옛 속주를 흡수한 게르만 왕국들의 출현이었다. 확인 가능한 주요 집단은 갈리아 남서부와 스페인을 지배했던 서고트족(비시고트족), 론 계곡 상류의 부르군트족, 갈리아 북부와 중부에서 부상한 살리 프랑크족, 그리고 5세기 말에 이탈리아를 지배하기 전까지 판노니아에 근거지를 둔 동고트족(오스트로고트족)이었다. 454년 샬롱(카탈라우눔 평원)의 승리자인 로마의 장군 아이티우스가 죽은 후, 갈리아에서 제국의 권력은 급속히 붕괴되었다. 461년 살해되기 전에 마이오리아누스 황제(재위 457-461년)가 임명한 로마 갈리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인.. 2021. 11. 6. 밀라노에서 해야 할 7가지 활동 도시 방문을 완벽하게 만들어줄 밀라노의 7가지 활동 예술, 패션, 음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구의 도시 밀라노! 확실히 할 일이 많은 도시이다. 밀라노에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밀라노 방문을 완벽하게 만들어줄 7가지 활동을 소개한다. 1. 축구 경기장 방문 밀라노에는 할 일이 많다. 먼저 밀라노의 아름다운 축구 경기장부터 시작한다. AC 밀란의 팬들에게는 산 시로로 알려져 있지만, 인터 밀란의 모든 팬들에게는 경기장의 원래 이름인 주세페 메아차로 알려져 있다. 이 역사적인 경기장은 1926년에 지어졌고 8만 명이 조금 넘는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거대한 경기장! 산 시로는 지하철 역 산 시로 스타디오 근처에 있는 안젤로 모라티 광장에 위치해 있다. AC 밀란과 인테르나치오날레는 둘 다 이곳에서 홈경.. 2021. 11. 4. 런던의 더비 이들은 최고의 런던 더비이다. 잉글랜드 축구 수도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경기 런던은 의심할 여지없이 잉글랜드의 축구 수도이다. 4개의 최고 수준에 13개의 프로 팀이 있는 더비의 수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많다. 하지만 어떤 런던 더비가 가장 특별할까? 북런던 더비 아스날 - 토트넘 홋스퍼 아스날과 토트넘 홋스퍼가 경기할 때, 북런던 전체가 긴장한다. 두 클럽 간의 경쟁은 1913년 아스널이 하이버리로 옮긴 이후 존재해 왔다. 그들 사이의 많은 경기 때문에, 긴장감은 점점 더 높아졌다. 양 팀의 팬들은 서로를 싫어하고 2001년 솔 캠벨이 그랬던 것처럼 적으로 바뀌는 선수에게는 더욱 그렇다. 아스날과 토트넘은 204번 대결을 했다. 거너스는 84승으로 더 좋은 성적을 거뒀다. 북런던 더비의 54번은 무승부로.. 2021. 11. 3. 이슬람 제국 역사 지도 - 3편 라시둔 칼리파 시대 (644-661년) 644-656 우스만 이븐 아판 우스만 이븐 아판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6촌이자 사위이자 주목할만한 동료이자 라시둔 또는 "정당한 칼리파"의 세 번째였다. 메카 일족인 쿠라이시 우마이야 부족 출신의 그는 초기 이슬람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쿠란 표준본을 편찬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리파 우마르가 59/6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칼리파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64/65세의 나이로 뒤를 이었다. 우스만의 지도하에 이슬람 제국은 650년 파르스(현재의 이란)로, 651년 호라산(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의 일부 지역으로 확장했다. 아르메니아 정복은 64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에는 광범위한 저항과 불안이 있었고, 결국 무장 반란과 그의 암살을 초래했다. 우스만은 루카이야와 결혼했고, .. 2021. 10. 29. 이슬람 제국 역사 지도 - 2편 라시둔 칼리파 시대 (632-644년) 632-634년 아부 바크르 아부 바크르 압둘라 이븐 우스만 아비 쿠하파는 그의 딸 아이샤를 통해 예언자 무함마드의 장인이자 이슬람의 초대 칼리파였다. 그는 무슬림에게 알 시디크라는 존칭으로 알려져 있다. 632년 무함마드가 타계한 후, 아부 바크르는 초대 라시둔 칼리파로서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를 계승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리다 전쟁으로 알려진 수많은 봉기를 극복했으며 그 결과 아라비아 반도 전체에 걸쳐 이슬람 국가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확장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이웃한 사산 제국과 비잔틴 제국에 대한 초기 침공을 지휘했고, 그의 죽음 이후 수년간 무슬림은 페르시아와 레반트를 정복하게 되었다. 아부 바크르는 재위 2년 2개월 14일 만에 병으로 사망했다. 632-633년 아라비아를 평정.. 2021. 10. 28. 이전 1 ··· 32 33 34 35 36 37 38 ··· 61 다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