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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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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전쟁32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2차 그리스 침공 5편 살라미스 해전 BC 480년 9월 - 살라미스 해전 전조 연합군 함대는 아테네의 마지막 대피를 돕기 위해 아르테미시온에서 살라미스로 노를 저었다. 도중에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함대의 이오니아 그리스 선원들에게 그들이 들릴 수 있는 모든 샘에 연합군의 대의를 위해 귀순하라는 비문을 남겼다. 테르모필라이에 이어 페르시아 군대는 항복하지 않은 보이오티아 도시 플라타이아와 테스피아이를 불태우고 약탈한 후 사람들이 모두 피난한 아테네로 진군했다. 연합군(대부분 펠로폰네소스인)은 코린토스 지협을 방어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이 지협을 통과하는 외길을 부수고, 그 너머로 방어벽을 쌓았다.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가 사로니코스 만을 가로질러 군대를 수송하는 것을 연합군 함대가 막을 수 없는 한 이 전략은 결함이 있는 것이었다. 아테네의.. 2021. 6. 4.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2차 그리스 침공 4편 아테네 파괴 테르모필라이 전투와 아르테미시온 해전 이후 페르시아군이 레오니다스의 시신을 다시 찾아오자, 크세르크세스는 격분하여 시신을 참수하고 나무 위에 매달라고 명령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인이 전통적으로 "용감한 전사"를 매우 명예롭게 대했기 때문에, 이것이 매우 흔치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아르테미시온 해전이 있기 전에 스키아토스에서 붙잡힌 피테아스의 예는 이 제안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크세르크세스는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헬레스폰토스의 물이 그에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채찍질을 했다고 한다. 페르시아군이 떠난 후, 그리스인은 전사자들을 모아 언덕에 묻었다. 페르시아의 침공이 격퇴된 후 레오니다스를 기념하기 위해 테르모필라이에 돌사자가 세워졌다. 전투가 끝난 지 40년 만에 레오니다.. 2021. 6. 3.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2차 그리스 침공 3편 아르테미시온 해전 BC 480년 8월 - 아르테미시온 해전 전조 아마도 7월 말 또는 8월 초에 연합군 함대는 페르시아 군대가 올림푸스 산을 지나 해안을 따라 진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아르테미시온 곶을 향해 북쪽으로 항해했다. 연합군은 아르테미시온에 기지를 확보하여 아마도 배를 곶의 해변에 끌어올려 두고는 필요에 따라 신속하게 출항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연합군은 페르시아 함대의 접근을 경계하기 위해 스키아토스에 3 척의 정찰선을 보냈으나 2주가 지나도록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스키아토스 앞바다에 10 척의 시돈 삼단노선이 도착했고, 연합군의 주력 함대는 섬에 켜진 신홋불을 통해 정보를 받았다. 그러나 연합군 순찰선들은 알지 못한채 두 척은 나포되었고, 한 척은 좌초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뒤이은 혼란 속에서 .. 2021. 6. 2.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2차 그리스 침공 2편 테르모필라이 전투 BC 480년 봄 -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테살리아 BC 480년 4월에 유럽으로 건너간 페르시아 군대는 그리스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다섯 개의 주요 식량창고가 길을 따라 설치되었다. 헬레스폰토스 트라키아 쪽에 있는 화이트 헤드랜드, 페린토스 영토의 티로디자, 아시아 군대가 발칸 동맹과 연결된 에브로스 강 하구의 도리스코스, 스트리몬 강의 에이온, 그리고 오늘날의 테살로니키인 테르미에 설치되었다. 그곳에는 캠페인을 준비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아시아로부터 식량이 보내져 왔다. 동물들을 사들여 살 찌운 반면, 지역 주민들은 몇 달 동안 곡물을 가루로 갈아놓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페르시아 군대는 헬레스폰토스에서 테르미까지 약 600 km (360 마일)의 여정을 저항 없이 이동하는데 약 3개월이 걸렸다.. 2021. 6. 1.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2차 그리스 침공 1편 BC 490-480 - 전쟁 사이의 기간 아케메네스 제국 첫 번째 침공의 실패 이후, 다리우스는 그리스를 완전히 복속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거대한 새로운 군대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BC 486년, 이집트 신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은 그리스 원정을 무기한 연기하도록 만들었다. 다리우스는 이집트 진군을 준비하던 중 사망했고, 페르시아 왕위는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넘어갔다.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고, 매우 빠르게 그리스 침공을 위한 준비를 재개했다. 전면적인 침공을 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계획, 비축, 징병이 필요했다. 크세르크세스는 헬레스폰토스에 그의 군대가 유럽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도록 하고, 아토스 산의 지협(BC 492년 페르시아 함대가 이 해안선을 도는 동.. 2021. 5. 31.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1차 그리스 침공 하(下) 마라톤 전투 마라톤 전투 페르시아군은 아티카 해안을 따라 항해했고 추방된 아테네의 참주 히피아스(원정대에 동행)의 조언에 따라 아테네에서 북동쪽으로 약 27 km 떨어진 마라톤 만에 상륙했다. 페르시아와 싸운 경험이 가장 많은 아테네 장군 밀티아데스의 지도 아래 아테네군은 마라톤 평원의 두 출구를 막고 페르시아군이 내륙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빠르게 진군했다. 동시에 아테네의 가장 위대한 주자 페이디피데스(또는 필리피데스)는 스파르타로 보내져 스파르타 군대가 아테네를 돕기 위해 진군할 것을 요청했다. 페이디피데스는 성스러운 평화의 시기인 카르네이아 축제 기간에 도착하여, 스파르타군이 보름달이 뜰 때까지 전쟁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고, 아테네는 적어도 열흘 동안 증원군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작은 .. 2021. 5. 29.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1차 그리스 침공 중(中) BC 490 -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의 캠페인 사실상 아테네를 고립시킨 스파르타의 혼란을 틈타 다리우스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응징하기 위해 육해군 합동으로 원정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수사에 군대가 집결했고, 함대가 모여 있는 킬리키아로 진군했다. 원정대의 지휘권은 메디아의 다티스와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의 아들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주어졌다. 페르시아군의 규모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가 보낸 함대는 600 척의 삼단노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얼마나 많은 수송선이 그들과 동행했는지에 대한 역사 사료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헤로도토스는 BC 480년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당시 3,000 척의 수송선이 1,207 척의 삼단노선과 동행했다고 주장했다.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일부는 이 숫자를 합리적인 .. 2021. 5. 27.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1차 그리스 침공 상(上) 페르시아 전쟁 중 그리스에 대한 첫 번째 페르시아의 침공은 BC 492년에 시작되어 BC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주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응징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이 명령했으며 두 개의 별개의 캠페인으로 침공은 이루어졌다. 이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 대항한 반란 동안 이오니아 도시들을 지원하면서 다리우스의 분노를 샀다. 게다가 아테네는 이사고라스에 의해 소환된 스파르타 군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클레이스테네스가 흙과 물을 그들에게 바친 이래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였다. 다리우스는 또한 자신의 제국을 유럽으로 확장하고 서쪽 국경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BC 492년 마르도니오스가 이끄는 첫 번째 캠페인은 트라키아를 재 복속시키고, B.. 2021. 5. 27.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이오니아 반란 하(下) 반란의 종식 BC 494-493 - 반란의 종식 라데 해전 반란이 일어난 지 6년(BC 494년)에 페르시아군은 재편되었다. 가용한 지상군은 하나의 군대로 편성되었고, 다시 복속된 키프로스인과 이집트인, 킬리키아인, 페니키아인이 지원한 함대가 동반되었다. 페르시아군은 다른 거점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바로 밀레토스로 향했는데, 아마도 진원지에서 반란을 진압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대(對) 그리스 전문가인 메디아 출신의 장군 다티스는 이때 다리우스에 의해 이오니아로 파견된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그가 이 페르시아 공세를 전체적으로 지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군대의 접근을 들은 이오니아인은 마이안드로스 하구 맞은편에 있는 미칼레 산 북부에 위치한 파니오니움(신성한 만남의 장소)에서 만나 육지에서 싸우지 않기로 .. 2021. 5. 25.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이오니아 반란 중(中) 제국의 반격 BC 497-495 - 페르시아 제국의 반격 에페소스 전투 이후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는 정확한 연대가 모호하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BC 498년에 사르디스와 에페소스를 배치한다. 헤로도토스는 그다음에 반란이 확산된 것을 기술하고(따라서 BC 498년에도) 키프로스인은 1년간의 자유를 누렸고, 그래서 BC 497년에 키프로스는 행동을 취했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다우리소우와 히마이에스와 오타네스, 그들은 모두 페르시아의 장군으로, 다리우스의 딸들과 결혼했으며 사르디스로 진군한 이오니아 사람들을 추격하여 그들의 배로 몰고 갔다. 이 승리를 거둔 뒤에, 그들은 도시들을 자기들끼리 나누어서 약탈했다." 이 구절은 에페소스 전투 직후 페르시아 장군들이 반격을 가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헤로도.. 2021. 5. 24.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이오니아 반란 상(上) 반란의 시작 아이올리스인, 도리아인, 키프로스, 카리아가 관련된 이오니아 반란은 BC 499년부터 493년까지 지속되었으며 페르시아 지배에 저항한 소아시아 여러 그리스 지역의 무력 봉기였다. 반란의 중심에는 밀레토스의 두 참주, 히스티아이오스와 아리스타고라스의 개별 행동과 페르시아가 그들을 통치하도록 임명한 참주들에 대한 그리스 소아시아 도시들의 불만이 있었다. 이오니아의 도시들은 BC 540년 경에 페르시아에 정복되었고, 그 후 사르디스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에 의해 임명된 원주민 참주들이 통치했다. BC 499년,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는 그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페르시아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낙소스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했다. 원정은 큰 낭패를 보았고, 그가 참주 지위에서 곧 쫓겨날 것을 감.. 2021. 5. 23.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낙소스 공방전 낙소스 공방전(BC 499년)은 다리우스 대왕의 지원을 받아 페르시아 제국의 이름으로 낙소스 섬을 정복하려는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의 실패한 시도였다. 이 사건은 궁극적으로 50년 동안 지속된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의 시작이었다. 추방된 낙소스 귀족들은 자신들의 섬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리스타고라스에게 접근했다. 밀레토스에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할 기회를 찾은 아리스타고라스는 낙소스 정복을 위해 그의 대군주인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과 지역 사트라프인 아르타페르네스의 도움을 받았다. 원정군에 동의한 페르시아인은 메가바테스의 지휘 아래 200척의 삼단노선 함대를 집결시켰다. 원정군은 순식간에 파국으로 치달았다. 아리스타고라스와 메가바테스는 낙소스로 가는 여정에서 다툼을 벌였고, 누군가(아마 메가바테스)가.. 2021. 5. 22.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서막(序幕)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종종 페르시아 전쟁이라고도 함)은 BC 499년에 시작되어 449년까지 지속된 아케메네스 제국과 그리스 도시 국가 간의 일련의 분쟁이었다. BC 547년에 키루스 대왕이 그리스인이 거주하는 이오니아 지역을 정복하면서 괴팍한 그리스인의 정치 세계와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 사이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독립심이 강한 이오니아 도시들을 통제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페르시아는 각 도시에 참주를 임명했다. 이것은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모두에게 많은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BC 499년,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낙소스 섬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원정은 대실패로 끝나게 되면서 아리스타고라스는 자신의 자리에서 쫓겨나기 전에 모든 소아시아의 그리스 인들이 페.. 2021. 5. 21.
펠루시움 전투(Battle of Pelusium, BC 525) 펠루시움 전투는 아케메네스 제국과 이집트 사이의 첫 번째 주요 전투였다. 이 결정적인 전투는 파라오의 왕좌를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에게로 옮겨 이집트의 아케메네스 제27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BC 525년, 현재의 포트사이드에서 남동쪽으로 30km 떨어진 이집트 나일 삼각주의 동쪽 극단에 있는 중요한 도시인 펠루시움 근처에서 싸웠다. 전투는 멤피스의 포위 공격으로 이어졌다. 배경 헤로도토스의 동기와 배경에 대한 설명 펠루시움 전투로 이어지는 사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설명은 그리스 역사가들, 특히 헤로도토스의 이야기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집트의 파라오 아마시스 2세와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 사이의 갈등은 대부분 이집트인과 같은 여러 개인들을 포함하는 점진적인 과정이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캄비.. 2021. 3. 19.
오피스 전투(Battle of Opis) BC 539년 9월에 벌어진 오피스 전투는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한 키루스 대왕의 페르시아 군과 나보니두스의 신 바빌로니아 제국 간의 주요 교전이었다. 당시 바빌로니아는 아직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서아시아의 마지막 강대국이었다. 전투는 수도 바빌론 북쪽에 있는 전략적인 도시 오피스 또는 그 근처에서 벌어졌다. 전투는 페르시아 인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며칠 후, 시파르는 페르시아에 항복했고 키루스의 군대는 저항 없이 바빌론에 들어갔다. 이후 키루스는 바빌로니아와 그 영토의 왕으로 선포되어 바빌론의 독립을 종식시키고 바빌로니아 제국을 페르시아 대제국에 통합시켰다. 위치 전투 장소는 현재의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약 80 ㎞ 떨어진 티그리스 강가에 있는 오피스였다. 이 도시는 강을 건너는 데.. 2021.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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