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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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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 3편 아르키다모스 전쟁 중(中) 페리클레스가 죽은 후, 아테네인은 그의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전략에 다소 반대하여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에게 전쟁을 가져다주는 보다 공격적인 전략으로 전환했다. 이 시기에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특히 중요했던 것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강경파 지도자였던 클레온이었다. 영리한 새로운 장군 데모스테네스(후대 아테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와 혼동하지 않도록)가 이끄는 아테네군은 펠로폰네소스에 대한 해군의 급습을 계속하면서 몇몇 성공을 거두었다. BC 428/427년 - 미틸리니 반란 계획과 준비 과두 정권이었던 미틸리니 정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아테네에 대한 반란을 고려했지만, 그들이 BC 430년대에 스파르타에 처음 접근했을 때, 스파르타인은 그들을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 2021. 6. 23.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 2편 아르키다모스 전쟁 상(上) BC 431-421년 - 아르키다모스 전쟁 코린토스를 제외한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은 거의 전적으로 육지에 기반을 둔 세력이었으며, (전설적인 스파르타 군대 덕분에)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규모 지상군을 소환할 수 있었다. 아테네 제국은 비록 아티카 반도에 기반을 두었지만 에게 해의 섬에 걸쳐 퍼져 있었다. 아테네는 이 섬들로부터 받은 공물로 막대한 부를 얻었다. 아테네는 해군력을 통해 제국을 유지했다. 따라서, 두 세력은 상대적으로 결정적인 전투를 벌일 수 없었다. 스파르타의 왕 아르키다모스 2세 이후 아르키다모스 전쟁(BC 431-421년)으로 알려진 첫 번째 전쟁 동안 스파르타의 전략은 아테네를 둘러싼 영토를 침공하는 것이었다. 이 침략으로 아테네인은 도시 주변의 생산적인 땅을 빼앗겼지만, 아.. 2021. 6. 22.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 1편 평화 조약의 와해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년)은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이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맞서 싸운 고대 그리스 전쟁이다.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전쟁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 단계인 아르키다모스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아티카를 반복적으로 침공했고, 아테네는 우세한 해군을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 해안을 습격하여 제국의 불안 징후를 억제하려고 했다. 이 전쟁은 BC 421년에 니키아스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끝이 났다. 그러나 조약은 펠로폰네소스에서의 재투쟁으로 인해 곧바로 약화되었다. BC 415년 아테네는 시켈리아(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이를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으나, BC 413년 전군이 격파되면서 공격은 참담하게 실패했다. 이 전쟁은 일반적으로 데켈레이아 전.. 2021. 6. 21.
베르사유 궁 - 화단과 정원 화단 남쪽 화단(5)은 여왕의 창문 아래로 펼쳐졌다. 사진에 오랑주리 테라스가 나와 있고 그 너머에 스위스 호수가 있다. 북쪽 화단(2)은 왕의 첫 번째 아파트 아래에 펼쳐졌다. 화단의 중앙에 피라미드 분수와 양쪽에 왕관 못이 있다. 북쪽 화단 아래에 있는 넵튠 못(4)은 베르사유의 "작은 공원"에서 가장 큰 인공 못이다. 거대한 못 바로 전에 물 위에 여러 그룹의 납 조각상들로 장식되어 있는 둥근 용의 못(3)이 있다. 네 마리의 돌고래가 용 주위를 헤엄치는 모습이다. 물 정원(1)은 궁전 산책로에 있는 두 개의 큰 못이다. 남쪽 화단을 유지하고 있는 오랑주리(6)는 2개의 큰 계단(100계단)을 지탱하는 2개의 날개가 측면을 향하고 있다. 루이 14세 당시 오렌지 나무 2,000 그루와 핑크 월계수 .. 2021. 6. 20.
베르사유 궁 - 궁전과 안뜰 정원 쪽에서 본 궁전의 조감도. 왕정 시대에는 적어도 3,000명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아야 했다. 아흐므 광장(Place d’Armes, 퍼레이드 장소)의 남쪽에는 루이 13세 당시의 작은 고대 마을인 '오래된 베르사유'가 있었다. 이 오래된 마을은 왕정 시대 동안 확장되어 번화한 마을이 되었다. 건물 증축을 위한 푸른 지붕이 있는 전경에 1789년 6월 20일 제3신분 의원 300명이 유명한 선서를 한 '주드폼(jeu de paume)'이 보인다. 아흐므 광장 북쪽은 새로운 베르사유가 건설되었다. 행정과 부처의 집중과 발전은 귀족들이 궁전과 가까운 곳에 거처를 두기를 원했기 때문에 부처 건물과 개인 저택의 건설을 야기했다. 아브뢰부아 거리(물이 있는 거리) 또는 아흐므 광장 근처에 오를레앙, 콩데, .. 2021. 6. 19.
바빌론 - 이슈타르 문과 유프라테스 서쪽 지역 12. 벨릿니나(Belit-Nina) 신전, 13. 하닷(Hadad) 신전, 14. 샤마쉬(Shamash) 신전 이 세 개의 신전은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바빌론 신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사진에 보이는 벨릿니나 신전은 북쪽 성벽과 매우 가까웠다. 바빌론의 다른 모든 신전들처럼 유약을 바른 벽돌로 덮인 화려하게 장식된 파사드를 가지고 있다. 하닷 신전은 더 작았다. 신전은 서쪽의 하닷 문 근처에 서 있었고, 신도시를 통과하는 운하와 가까웠을 것이다. 배경에 성벽 가까이에 있는 벨릿니나 신전이 보인다. 샤마쉬 신전은 신도시 남쪽에 지어졌다. 신전의 모양은 지구라트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유프라테스 건너편 기슭과 멀리 거대한 지구라트를 볼 수 있는 각도의 샤마쉬 신전. 16. 유프라테스의 다리 유프라테스 강에 놓.. 2021. 6. 18.
바빌론 - 유프라테스 동쪽 지역 바빌론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북쪽 입구인 이슈타르 문, 왕궁, 그리고 행렬의 길. 훨씬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구시가지라 불리는 도시의 동쪽 부분이 있다.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3.72 미터 높이의 성벽이 솟아 있다. 위대한 사원과 신성한 지역이 있는 도시의 중심부를 볼 수 있다.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 지어진 신도시라고 불리는 도시의 서쪽 부분. 이 고대 대도시의 매력 중 하나는 테라스에 지어진 거대한 지역을 형성하는 집들이 많은 밀집된 구역과 멋진 건물을 찾을 수 있는 거대한 에워싸인 공간 사이의 대조였다. 1. 북쪽 성채 방문자가 바빌론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장엄하게 다가오는 궁전 벽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이 거대한 주변 벽은 뭉툭한 작은 톱니 모양으로 된 육중한 플랫폼으로 둘러싸인 사각형 탑으로 .. 2021. 6. 17.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 오데이온, 스토아, 그리고 극장 헤로데스 아티쿠스 오데이온 파르테논 신전을 제외하고 아크로폴리스의 유명한 기념물에 대해 말한다면 먼저 헤로데스 아티쿠스 오데이온(16)을 언급할 수 있다. 이 멋진 금융업자는 BC 160년에 바위에 이 극장을 파게 했다. 오데이온은 5,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그리스 양식에 따르면, 절벽을 잘라낸 반원형 관객석은 외부 지지대에 의해 붕괴로부터 보호되었다. 관객석 아래에는 반원형의 오케스트라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로게이온이나 무대가 있었다. 모형에서 오데이온은 다른 건물들처럼 재건된 모습이 아닌 오늘날 모습 그대로 나타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웅장하고 가장 잘 보존된 유적지 중 하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사진에서 콘서트나 축제 저녁에 여전히 사용되는 전체 관객석뿐만 아니라 손상되지 않은 부벽.. 2021. 6. 17.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 프로필라이아와 서쪽 부분 아레포리온 아레포리온(또는 아레포레이온) 건물(9)은 아테나의 페플로스(고고 및 고전 시대 그리스 여성용 긴 드레스)가 짜인 곳이다. 아레포리는 6월에 열린 아테네 축제로, 그 목적은 메마른 대지를 위해 아테나의 습기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아레포레스라 불린 네 명의 어린 소녀들이 성소에 머물도록 선택되었고, 의식 전날 밤 동안, 그들은 각자 아크로폴리스로 가지고 가야만 했던 신비스러운 장식함을 여사제로부터 받았다. 아레포레스의 집은 아크로폴리스의 절벽 가까이에 지어졌다. 위에서 바라본 아레포리온. 건물 왼쪽에는 열린 안뜰, 또는 공 놀이터가 있었다. 벽 옆, 안뜰 내부에 문이 있어 그 사이로 아글라우로스 동굴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 동굴에 헬라딕 시대 후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출처가 있었다. 안뜰 밖.. 2021. 6. 15.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 파르테논 신전과 동쪽 부분 길이 300 미터, 높이 170 미터, 폭 156 미터의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 시 위로 솟아 있다. 단순한 언덕 위에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장소 중 하나가 서 있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그리스 세계로 뻗어나가려던 BC 5세기에 페리클레스는 사원, 극장, 오데이온으로 장식된 도시의 선동자였다. BC 449년에서 431년 사이에 파르테논 신전, 프로필라이아, 아테나 니케 신전, 에레크테이온의 건축을 시작했다. 이 유적지에는 AD 267년 에룰로이(게르만 부족의 무리)의 침입으로 도시가 부분적으로 파괴되기 전까지 아크로폴리스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중에 아테네와 아크로폴리스는 문명화된 세계에 의해 점점 더 잊히게 되었다. 아크로폴리스의 전체 모습. 사진 아래쪽에 있는 출입문은 아크로폴리스 서쪽에 있다. 아크.. 2021. 6. 14.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60-445년)은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특히 테바이와 같은 스파르타의 다른 동맹국들과, 아르고스의 지원을 받는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제2차 신성 전쟁과 같은 일련의 분쟁과 사소한 전쟁으로 이루어졌다. 아테네의 장벽 건설, 메가라의 이탈, 아테네 제국의 성장에 스파르타가 느낀 부러움과 우려 등 전쟁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BC 460년에 오이노이 전투로 시작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은 아테네-아르고스 동맹군에 패배했다. 처음에 아테네는 그들의 우수한 함대를 이용하여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전투의 우위를 점했다. 그들은 또한 타나그라에서 스파르타와 그의 동맹군이 아테네 군대를 격파한 B.. 2021. 6. 13.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델로스 동맹 전쟁 하(下) 이집트 캠페인 이집트 캠페인은 일반적으로 BC 460년에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연대마저도 일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때 아테네는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와 이미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가 이러한 상황에서 정말로 이집트 캠페인에 전념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따라서 이 캠페인은 BC 462년 스파르타와의 전쟁 전에 시작되었다고 제안되었다. 그러나, 이 연대는 일반적으로 거부되고, 아테네 측에서 이집트 캠페인은 단순히 정치적 기회의 일부분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 제국의 이집트 사트라피는 특히 반란을 일으키기 쉬웠는데, 그중 하나는 최근인 BC 486년에 일어났다. BC 461년 또는 460년, 이집트 국경에 살고 있는 리비아의 왕 .. 2021. 6. 12.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델로스 동맹 전쟁 상(上)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한 캠페인 - 트라키아 지역 이온(Eion) 공방전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동맹의 첫 캠페인은 스트리몬 강 하구의 이온 시를 상대로 벌어졌다. 투키디데스는 동맹의 역사에 대한 상세한 연대기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이 캠페인이 일어난 해는 불확실하다. 공방전은 가을부터 다음 해 여름까지 1년간 지속된 것으로 보이며 역사가들은 BC 477-476년 또는 BC 476-475년을 지지했다. 이온은 도리스코스와 함께 두 번째 페르시아 침공 기간과 후에 트라키아에 남겨진 페르시아의 주둔지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온에 맞선 캠페인은 아마도 트라키아에서 페르시아의 존재를 제거하기 위한 일반적인 캠페인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이 시기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도리스코.. 2021. 6. 10.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아테네의 부상 BC 479-478년 - 그리스의 역습 미칼레와 이오니아 미칼레는 여러 면에서 그리스인이 페르시아에 대한 공세를 펼치게 된 새로운 국면의 시작이었다. 미칼레에서의 승리의 즉각적인 결과는 그리스 소아시아 도시들 사이의 두 번째 반란이었다. 사모스인과 밀레토스인은 미칼레에서 페르시아 제국과 적극적으로 싸우면서 공개적으로 그들의 반란을 선언했으며 다른 도시도 그들의 본을 따랐다. 세스토스 미칼레 직후 연합군 함대는 헬레스폰토스로 부교를 파괴하러 갔지만 이미 파괴된 것을 알게 되었다. 펠로폰네소스인은 고향으로 항해를 했지만, 아테네군은 여전히 페르시아의 수중에 있는 케르소네소스를 공격하기 위해 남아있었다. 페르시아와 제국의 동맹들은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인 세스토스를 만들었다. 그 가운데는 카르디아의 외.. 2021. 6. 9.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2차 그리스 침공 7편 미칼레 전투 BC 479년 6월 - 미칼레 전투 스파르타가 플라타이아로 군대를 보내자 이에 대응하여, 크산티포스 휘하의 아테네 해군은 델로스에 있던 연합군 함대와 합류했다. 그 후 사모스의 대표단이 접근하여 연합군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를 상대로 승리할 경우 이오니아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들은 더 나아가 페르시아 함대의 사기 저하와 항해에 적합한 상황이 저하된 것을 지적했다. 레오티키데스는 이것을 시도하기로 결심하고 사모스를 향해 항해했다. 전조 페르시아군은 연합군 함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모스에서 이오니아 본토로 출항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는 그들이 회의에서 연합군을 해전에서 이길 수 없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페니키아 배들을 멀리 보내고(헤로도토스는 이유를 설명하지.. 2021. 6. 6.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2차 그리스 침공 6편 플라타이아 전투 마르도니오스는 그리스 북부에 있는 아케메네스의 나머지 군대와 함께 남았다. 그는 그리스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최고의 군대들, 특히 불사 부대, 메디아인, 사카족, 박트리아인, 인도인을 선발했다. 헤로도토스는 마르도니오스의 주요 부대의 구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르도니오스는 먼저 불사 부대라 불리는 모든 페르시아인을 선발했다. 왕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 장군 히다르네스만을 제외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페르시아 중기병과 천 마리의 말, 그리고 메디아인과 사카족과 박트리아인과 인도인들, 그리고 그들의 보병과 나머지 기병들을 함께. 그는 이들을 모두 선택하였다. 나머지 동맹국들 가운데서, 그는 각 민족 중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들과, 그가 잘 지원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을 뽑았다. 그 결.. 2021. 6. 5.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2차 그리스 침공 5편 살라미스 해전 BC 480년 9월 - 살라미스 해전 전조 연합군 함대는 아테네의 마지막 대피를 돕기 위해 아르테미시온에서 살라미스로 노를 저었다. 도중에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함대의 이오니아 그리스 선원들에게 그들이 들릴 수 있는 모든 샘에 연합군의 대의를 위해 귀순하라는 비문을 남겼다. 테르모필라이에 이어 페르시아 군대는 항복하지 않은 보이오티아 도시 플라타이아와 테스피아이를 불태우고 약탈한 후 사람들이 모두 피난한 아테네로 진군했다. 연합군(대부분 펠로폰네소스인)은 코린토스 지협을 방어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이 지협을 통과하는 외길을 부수고, 그 너머로 방어벽을 쌓았다.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가 사로니코스 만을 가로질러 군대를 수송하는 것을 연합군 함대가 막을 수 없는 한 이 전략은 결함이 있는 것이었다. 아테네의.. 2021. 6. 4.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2차 그리스 침공 4편 아테네 파괴 테르모필라이 전투와 아르테미시온 해전 이후 페르시아군이 레오니다스의 시신을 다시 찾아오자, 크세르크세스는 격분하여 시신을 참수하고 나무 위에 매달라고 명령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인이 전통적으로 "용감한 전사"를 매우 명예롭게 대했기 때문에, 이것이 매우 흔치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아르테미시온 해전이 있기 전에 스키아토스에서 붙잡힌 피테아스의 예는 이 제안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크세르크세스는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헬레스폰토스의 물이 그에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채찍질을 했다고 한다. 페르시아군이 떠난 후, 그리스인은 전사자들을 모아 언덕에 묻었다. 페르시아의 침공이 격퇴된 후 레오니다스를 기념하기 위해 테르모필라이에 돌사자가 세워졌다. 전투가 끝난 지 40년 만에 레오니다.. 2021.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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