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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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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1차 그리스 침공 중(中) BC 490 -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의 캠페인 사실상 아테네를 고립시킨 스파르타의 혼란을 틈타 다리우스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응징하기 위해 육해군 합동으로 원정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수사에 군대가 집결했고, 함대가 모여 있는 킬리키아로 진군했다. 원정대의 지휘권은 메디아의 다티스와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의 아들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주어졌다. 페르시아군의 규모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가 보낸 함대는 600 척의 삼단노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얼마나 많은 수송선이 그들과 동행했는지에 대한 역사 사료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헤로도토스는 BC 480년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당시 3,000 척의 수송선이 1,207 척의 삼단노선과 동행했다고 주장했다. 현대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일부는 이 숫자를 합리적인 .. 2021. 5. 27.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1차 그리스 침공 상(上) 페르시아 전쟁 중 그리스에 대한 첫 번째 페르시아의 침공은 BC 492년에 시작되어 BC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주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응징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이 명령했으며 두 개의 별개의 캠페인으로 침공은 이루어졌다. 이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 대항한 반란 동안 이오니아 도시들을 지원하면서 다리우스의 분노를 샀다. 게다가 아테네는 이사고라스에 의해 소환된 스파르타 군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클레이스테네스가 흙과 물을 그들에게 바친 이래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였다. 다리우스는 또한 자신의 제국을 유럽으로 확장하고 서쪽 국경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BC 492년 마르도니오스가 이끄는 첫 번째 캠페인은 트라키아를 재 복속시키고, B.. 2021. 5. 27.
'모두가 이미 우리를 제외하고 있었다' : 릴은 어떻게 리그앙 타이틀을 차지했나 일요일에 릴이 앙제를 상대로 2-1로 승리함에 따라 강호 파리 생제르맹을 1점 차로 제치고 리그앙 우승컵을 거머쥐면서 올 시즌 유럽 축구에서 가장 가능성이 낮은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다른 모든 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릴의 예산은 카타르가 후원하는 PSG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프랑스 축구의 정상에 오른 것은, 최근 2018년에 단 1점 차로 강등을 피한 점에서 아주 놀랄만한 일이다. 성공의 비결은 릴의 굳게 단결된 선수단으로, 이들은 대부분 젊은 선수들과 그들을 이끄는 나이 든 스타 몇 명, 그리고 다양한 국적이 섞인 집단이다. 트란스페르마르크트에 따르면 릴은 리그앙에서 4번째로 어린 선수단을 자랑하며 이 선수 중 가장 적은 21명에게만 출전 시간을 주었다. 나이 많은 선수 중 한 .. 2021. 5. 26.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이오니아 반란 하(下) 반란의 종식 BC 494-493 - 반란의 종식 라데 해전 반란이 일어난 지 6년(BC 494년)에 페르시아군은 재편되었다. 가용한 지상군은 하나의 군대로 편성되었고, 다시 복속된 키프로스인과 이집트인, 킬리키아인, 페니키아인이 지원한 함대가 동반되었다. 페르시아군은 다른 거점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바로 밀레토스로 향했는데, 아마도 진원지에서 반란을 진압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대(對) 그리스 전문가인 메디아 출신의 장군 다티스는 이때 다리우스에 의해 이오니아로 파견된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그가 이 페르시아 공세를 전체적으로 지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군대의 접근을 들은 이오니아인은 마이안드로스 하구 맞은편에 있는 미칼레 산 북부에 위치한 파니오니움(신성한 만남의 장소)에서 만나 육지에서 싸우지 않기로 .. 2021. 5. 25.
극한의 날씨로 중국에서 21명의 울트라 마라톤 선수들이 사망 극한의 기상조건이 닥친 가운데 중국 북서부 100 km (62 마일) 산악 경주를 치른 후 21명의 울트라 마라톤 선수가 사망했다. 고지대 황허 신린 산악마라톤 대회가 22일(토) 오전 화창한 날씨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관영 환구시보에 따르면 현지 시각 오후 1시가 되자 기상 상황이 바뀌어 간쑤 성에서는 얼어붙은 비, 우박, 강풍이 선수들을 강타했다. 홍콩의 마라톤 단체인 '홍콩 100 울트라 마라톤'은 23일(일) 성명을 통해 "중국의 유명한 울트라 마라톤 선수 중 한 명인 량징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 마라톤 단체는 량씨가 홍콩 산악 경주 커뮤니티에서 "가장 좋아하는" 회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매년 열리는 홍콩 100 km 산악 경주에 정기적으로 참가했으며, 지난 2년 동안 준.. 2021. 5. 25.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이오니아 반란 중(中) 제국의 반격 BC 497-495 - 페르시아 제국의 반격 에페소스 전투 이후 헤로도토스의 이야기는 정확한 연대가 모호하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BC 498년에 사르디스와 에페소스를 배치한다. 헤로도토스는 그다음에 반란이 확산된 것을 기술하고(따라서 BC 498년에도) 키프로스인은 1년간의 자유를 누렸고, 그래서 BC 497년에 키프로스는 행동을 취했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다우리소우와 히마이에스와 오타네스, 그들은 모두 페르시아의 장군으로, 다리우스의 딸들과 결혼했으며 사르디스로 진군한 이오니아 사람들을 추격하여 그들의 배로 몰고 갔다. 이 승리를 거둔 뒤에, 그들은 도시들을 자기들끼리 나누어서 약탈했다." 이 구절은 에페소스 전투 직후 페르시아 장군들이 반격을 가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헤로도.. 2021. 5. 24.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이오니아 반란 상(上) 반란의 시작 아이올리스인, 도리아인, 키프로스, 카리아가 관련된 이오니아 반란은 BC 499년부터 493년까지 지속되었으며 페르시아 지배에 저항한 소아시아 여러 그리스 지역의 무력 봉기였다. 반란의 중심에는 밀레토스의 두 참주, 히스티아이오스와 아리스타고라스의 개별 행동과 페르시아가 그들을 통치하도록 임명한 참주들에 대한 그리스 소아시아 도시들의 불만이 있었다. 이오니아의 도시들은 BC 540년 경에 페르시아에 정복되었고, 그 후 사르디스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에 의해 임명된 원주민 참주들이 통치했다. BC 499년,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는 그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페르시아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낙소스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했다. 원정은 큰 낭패를 보았고, 그가 참주 지위에서 곧 쫓겨날 것을 감.. 2021. 5. 23.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낙소스 공방전 낙소스 공방전(BC 499년)은 다리우스 대왕의 지원을 받아 페르시아 제국의 이름으로 낙소스 섬을 정복하려는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의 실패한 시도였다. 이 사건은 궁극적으로 50년 동안 지속된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의 시작이었다. 추방된 낙소스 귀족들은 자신들의 섬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리스타고라스에게 접근했다. 밀레토스에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할 기회를 찾은 아리스타고라스는 낙소스 정복을 위해 그의 대군주인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과 지역 사트라프인 아르타페르네스의 도움을 받았다. 원정군에 동의한 페르시아인은 메가바테스의 지휘 아래 200척의 삼단노선 함대를 집결시켰다. 원정군은 순식간에 파국으로 치달았다. 아리스타고라스와 메가바테스는 낙소스로 가는 여정에서 다툼을 벌였고, 누군가(아마 메가바테스)가.. 2021. 5. 22.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서막(序幕)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종종 페르시아 전쟁이라고도 함)은 BC 499년에 시작되어 449년까지 지속된 아케메네스 제국과 그리스 도시 국가 간의 일련의 분쟁이었다. BC 547년에 키루스 대왕이 그리스인이 거주하는 이오니아 지역을 정복하면서 괴팍한 그리스인의 정치 세계와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 사이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독립심이 강한 이오니아 도시들을 통제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페르시아는 각 도시에 참주를 임명했다. 이것은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모두에게 많은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BC 499년,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낙소스 섬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원정은 대실패로 끝나게 되면서 아리스타고라스는 자신의 자리에서 쫓겨나기 전에 모든 소아시아의 그리스 인들이 페.. 2021. 5. 21.
아우렐리아누스 성벽과 성문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271년에 어떤 공격에서든지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로마 주변에 요새화 된 방벽(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건설할 것을 명령했다. 성벽의 둘레는 약 19 km였고 거의 도시 전체를 둘렀다. 성벽은 벽돌로 지어졌고 높이가 10 미터에 달했다. 캄푸스 마르티우스 옆의 테베레 강을 따라 있는 성벽의 일부를 볼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 영묘 옆의 테베레 강을 따라 있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포르타 포르투엔시스에 이르렀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있는 포르타 코르넬리아는 아일리우스 다리의 입구였다. 전경에 하드리아누스의 무덤의 조감도가 보인다. 포르타 코르넬리아 근처에 있는 포르타 트리옴팔리스. 맞은편의 바티칸 골짜기로 통하는 네로 다리. 포르타 셉티미아나와 트라스테베레의 입구. 바.. 2021. 5. 20.
영광의 기둥 라타 가도에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둥은 연속된 나선형 부조를 통해 그의 전쟁의 하이라이트를 알려준다. 장면을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 트라야누스 기둥보다 더 크게 만들었다. 트라야누스 기둥(사진 중앙)은 높이가 38 미터에 달했으며,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인에 대한 공적을 알려주는 200 미터의 나선형 부조로 구성되었다. 꼭대기에 있는 트라야누스의 동상은 밝은 색으로 빛났음에 틀림없다. 근처에 두 개의 도서관이 세워졌고 작품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도서관 위에 테라스가 설치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기둥과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있는 그의 우스트리눔. 일반적으로 이들 영묘에는 황제와 그의 가족의 유골을 포함하고 있었다. 출처 : maquettes-historiques 2021. 5. 20.
영묘, 우스트리눔 그리고 피라미드 영묘는 황제가 그들의 가족을 위해 짓도록 한 무덤이다.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지만 시신이 들어 있지 않은 '기념비'와는 반대로 말이다. 후대에 산탄젤로 성채가 되는 하드리아누스의 영묘가 가장 거대했다. 바티칸 나우마키아와 칼리굴라의 키르쿠스(모형에서 제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영묘는 거대한 개인 정원으로 둘러싸인 테베레 강둑에서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영묘는 에트루리아 무덤과 같은 건축양식으로 되어 있었다. 직사각형 기반 위에 편백이 심어진 고분으로 뒤덮인 원통형 구조물이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외에도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등 다른 유명한 사람들이 그곳에 묻혔다. 가장 유명한 기념비는 아마도 루키.. 2021. 5. 19.
로마의 경기장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훈련 또는 운동 경기를 위해 이 경기장을 캄푸스 마르티우스에 만들었다. 스타디움은 키르쿠스처럼 보였지만, 카르케르(전차 경주의 출발점)나 스피나는 없었다. 경기장은 길이 276 미터, 폭 54 미터였다. 오늘날의 나보나 광장은 경기장의 형태와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다른 각도에서 본 도미티아누스 스타디움. 스타디움에서 조금 더 왼쪽으로 가면 네로 목욕탕의 정원(작은 빨간 지붕과 노송 나무가 있는 정원)과 오른쪽 위에 오데움(녹색 지붕을 가진 반원형 극장)이 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아래에 세워진 또 다른 경기장의 조감도. 히포드로모스라고도 불리는 이 경기장은 팔라티노의 도무스 아우구스타나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목욕탕 사이에 지어졌다. 실제로 길이 145 미터의 크게 움푹 들어간 곳이었.. 2021. 5. 18.
콜로세움과 클라우디우스 신전 콜로세움과 그 웅장한 장소. 왼쪽에 클라우디우스 신전의 부벽이 있다. 앞에는 검투사 학교인 "루디 글라디아토리"가 있다. 오른쪽에 티투스 목욕탕이 있다. 배경에서 베누스와 로마의 신전을 추측할 수 있다. 콜로세움은 로마 포룸의 입구 바로 옆에 있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었다. 클라우디우스 신전은 네로 황제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피나가, 그녀가 암살한 신격화된 남편 클라우디우스를 추모하기 위해서 첼리오 언덕에 지었다. 그중 일부는 네로가 카일리우스 수도교의 저수지로 사용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콜로세움 바로 맞은편에 보이는 이 기념비적인 거대한 부벽 옆을 걷는 것은 인상적이다. 전경에 클라우디우스 신전의 거대한 플랫폼을 돌아가는 아쿠아 클라우디아가 있다. 이 사진은 신격 클라우디우스의 복합 건물을 지탱하는 거대.. 2021. 5. 18.
로마의 극장 원래, 로마의 극장은 연극이 끝날 때마다 철거한 단순한 목재 단상일 뿐이며 관객들은 서서 관람했다. 이 전체 전망은 캄푸스 마르티우스에서 로마의 활성화된 훌륭한 4개 극장을 볼 수 있게 한다. 사진 왼쪽에는 오데움, 중앙에 폼페이우스 대극장이 있고, 오른쪽에는 발부스 극장과 마르켈루스 극장이 있다. 폼페이우스 극장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 의해 로마에 세워진 최초의 상설 극장이다. 극장 건설을 금지하는 법을 피하기 위해, 폼페이우스는 극장의 관객석에 신전을 짓게 했다. 이 건물은 28,000석을 수용할 수 있었다. 폼페이우스 극장은 캄푸스 마르티우스의 가장 거대한 건축물 중 하나였다. 이곳의 파사드는 물론 베누스 신전을 지탱하는 구조였다. 극장 내부의 조감도. 폼페이우스가 그의 이름을 딴 극장을 세운 것은.. 2021. 5. 17.
로마의 목욕탕 고대 로마와 로마의 목욕탕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대중목욕탕의 이용은 전 민중에게 즐거움이자 휴식이었으며 저렴했다. BC 33년에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인 아그리파는 이 목욕탕을 지음으로써 자신의 책무를 나타내기를 원했고 출입이 자유로울 것이라고 암시했다. 이 원칙은 그때부터 후대에 개방될 모든 다른 황제 목욕탕의 규칙이 되었다. 여기 사진의 중앙에는 아그리파 목욕탕과 왼쪽 중앙에 있는 거대한 야외 욕장이 있다. 아그리파 목욕탕의 큰 야외 욕장은 판테온 쪽으로 지어졌다. 아그리파의 거대한 정원(호르티 아그리파이)은 네로 목욕탕과 인접해 있었으며, 이 정원의 중앙에는 포르티코 보누스 에벤투스라는 주랑 현관으로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인공 호수(또는 아그리파 호수)가 세워졌다. BC 1세기 말에 지어.. 2021. 5. 17.
로마의 수도교 사진 중앙에서 아쿠아 클라우디아를 볼 수 있다. 이 공공사업은 로마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 중 하나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 아래에서 완성되었으며 팔라티노(왼쪽 상단)의 비탈에 식수를 공급하고 로마에서 68 km 떨어진 산지에 수원을 두고 있었다. 사진의 중앙에서 첼리오 언덕을 통과하고, 중간에 클라우디우스 신전에 의해 형성된 넓은 건축 단지를 따라 지나간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아쿠아 클라우디아를 오른쪽 상단에 보이는 팔라티노까지 확장시켜 궁전에 물을 공급했다. 첼리오 언덕을 통과하는 아쿠아 클라우디아를 자세하게 본 모습. 아쿠아 클라우디아는 또한 첼리오 언덕의 저택들을 에워싸듯이 구부러지며 지나갔다. 사진 중앙에 있는 이 수로는 사실 이중 수로로 왼쪽에는 아피아, 오른쪽에는 마르키아이다. 아쿠아 아피아.. 2021. 5. 16.
로마의 다리 프로부스 다리는 아벤티노 강둑과 트라스테베레 강둑을 연결했다. 전경에 있는 BC 60년에 건설된 아이밀리우스 다리는 오른쪽의 트라스테베레 지점과 왼쪽의 포룸 보아리움 및 올리토리움을 연결했다. 또 다른 다리는 아이밀리우스 다리 근처에 지어진 수블리키우스 다리였다. 이 다리는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나무로 만들어졌다. 이 다리는 종교적인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폰티펙스라는 이름은 사제들이 이 다리를 유지하거나 재건해야 했던 종교적 의무에서 유래했다. 오른쪽에 있는 케스티우스 다리와 왼쪽에 있는 파브리키우스 다리는 테베레 섬과 본토를 연결했다. 다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장소에 있다. 케스티우스 다리는 석회질 벽돌로 재건해야 했다. 테베레 섬의 끝에는 아이스쿨라피우스(로마 의학의 신)의 신전이 .. 2021.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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