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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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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사57

기독교 연대표 - 르네상스 1305-1378년 아비뇽 유수,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에 거주하다 1307년 성전기사단 다수 체포, 재산의 몰수,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다 1308-1321년 단테 알리기에리가 신곡을 집필한 연도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인페르노/지옥은 1307년에서 1308년 사이, 푸가토리오/연옥은 1307-8년에서 1313-14년 사이, 그리고 파라디소/천국은 1313-14년에서 1321년(단테가 사망한 해) 사이이다 1311-1312년 카톨릭 빈 공의회가 성전기사단을 해산하다 1314년 성전기사단의 마지막 그랜드마스터 자크 드 몰레가 화형에 처해지다 1325년 루스의 대주교 표트르가 자신의 교구를 키이우에서 모스크바로 옮기다 1341-1351년 정교회 제5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1342년 파두아의 마르실리.. 2024. 2. 7.
기독교 연대표 - 중세 시대 800년 프랑크의 왕 샤를마뉴가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서방 최초의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다 849-865년 북방의 사도 브레멘의 대주교 안스가르가 북게르마니아, 덴마크, 스웨덴의 복음화를 시작하다 855년 대립교황 아나스타시우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도비쿠스 2세가 교황 베네딕투스 3세 대신 그를 임명하지만 대중의 압력으로 인해 철회하다 86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가 슬라브 민족을 전도하기 위해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를 파견하다. 그들은 성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869-870년 카톨릭 콘스탄티노폴리스 제4차 공의회에서 포티오스 총대주교를 규탄하다 (정교회는 거부) 879-880년 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제4차 공의회에서 교황 니콜라우스 1세와 필리오퀘를 비난하다 (카톨릭은 거부) .. 2024. 2. 5.
기독교 연대표 - 초기 기독교 공의회 시대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통합을 위해 히에로니무스가 최초의 위대한 기독교 공의회라고도 칭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첫 공의회에서 니케아 신조를 포고했지만, 아리우스, 테오나스파, 프톨레마이스의 세쿤두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니케아의 테오그니스와 같은 비삼위일체론자들에게 거부당하자 그들을 파문했으며, 부활절 논란을 다루고 예루살렘에 특별한 인정을 부여한 교법 VII과 같은 20개의 교법을 통과시켰다. 325년 5월 20일-6월 19일 제1차 니케아 공의회 325년 악숨 왕국(오늘날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이 기독교를 공식 국교로 선포한 두 번째 국가가 되다 325년 콘스탄티누스가 명을 내려 베들레헴의 예수탄생기념교회를 세우다 326년 11월 18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도의 무덤 위에 .. 2024. 2. 3.
중세 로마 제국 - 비잔틴 제국을 형성한 5대 전투 636년 야르무크에서 일어난 재앙 이후, 동로마 제국으로도 알려진 비잔틴 제국은 아랍 침공군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8세기 초까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북아프리카의 부유한 속주들은 영원히 사라졌다. 제국군이 완전히 물러나자 아랍군은 제국의 심장부인 아나톨리아로 이동했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두 번의 포위전을 겪었지만 난공불락의 성벽 덕에 구해졌다. 서방에서는 다뉴브 국경이 무너져 불가르인이 발칸반도에서 그들의 왕국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비잔틴은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9세기와 10세기 사이에 반격을 가하며 규모를 두 배로 늘렸다. 제국 행정의 군사화, 군대의 재편, 그리고 노련한 외교는 강력한 중세 국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적을 물리칠 때마다 셀주크, 노르만, 베네치아, 오스.. 2023. 1. 11.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침공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이야기는 100년 전 앨프레드 대왕이 잉글랜드가 침략받는 것을 보았듯이, 잉글랜드의 왕 애설레드가 바이킹 침략자들에게 자신의 왕국이 공격받는 것을 발견했을 때인 900년대 후반에 시작된다. 바이킹에게 대패한 후, 애설레드는 "데인겔트"라고 불리는 공물로 바이킹에게 보상하려고 했다. 이는 더 많은 바이킹의 공격을 부추겼을 뿐이다. 애설레드는 바이킹에게 조공을 계속 제공하기 위해 잉글랜드인들의 세금을 올려야 했다. 애설레드는 동맹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는 노르망디의 엠마와 결혼했다. 노르망디는 프랑스 북부의 공국이었고, 강력한 노르망디 공작은 자신의 여동생과 잉글랜드 왕의 결혼을 제안했다. 노르만인은 프랑스에 정착한 옛 바이킹이다. 결혼 후, 노르망디 공작은.. 2022. 9. 25.
바이킹의 유럽 침공 기독교 유럽에 야만인들이 침공한 이후 정착하고 이슬람 군대의 맹공이 뒤따랐던 것처럼, 새로운 야만인 침략자들의 물결은 바이킹의 형태로 북쪽에서 밀려왔다. 이 습격자들은 현재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라고 부르는 나라에서 왔다. 노르드인(북방인)은 숙련된 장인, 항해사, 선원이었다. 바이킹의 랑스킵(긴 배)은 바다와 대양을 항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얕은 강과 개울에서 기동 할 수 있었다. 이 약탈자들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어 보였다. 노르드인은 많은 신과 여신을 믿었다. 오딘은 그들 신들의 우두머리였다. 바이킹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도원은 구획 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리품을 얻기 위한 이 약탈자들의 가장 좋은 표적이었다. 바이킹은 잉글랜드 동부 해안의 작은 섬에 있는 린디스판 수도원을 .. 2022. 9. 25.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와 카롤루스(카롤링거) 제국 메로빙거조 프랑크 왕국은 강력한 왕조로 시작했지만,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들은 너무 약해서 장발 왕들의 별명이 게으름뱅이,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왕들(rois fainéants)로 바뀌었다. 이 왕들은 너무 게으르고 나약해서 프랑크 제국을 운영하는 대부분의 업무는 실제로 전투에서 프랑크 군대를 이끄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일을 수행했던 관료인 궁재의 어깨에 놓였다. 샤를 마르텔(해머)/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이러한 궁재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732년, 그는 투르에서 무어인들의 침략군에 맞서 프랑크군을 놀라운 승리로 이끌었고, 그들을 스페인으로 돌려보냈다. 프랑스에서 기독교는 구원을 받았고 마르텔은 전설이 되었다. 샤를 마르텔은 해머라는 칭호를 즐겼지만, 그는 결코 왕의 칭호를 받지 않.. 2022. 9. 25.
무함마드와 이슬람 무함마드는 가장 빠르게 성장한 종교 중 하나인 이슬람교의 창시자이자 예언자이다. 여기에서 무함마드와 그의 종교 원리에 대해 더 배울 것이며, 또한 이슬람이 중세 초기에 어떻게 제국으로 성장했는지 볼 것이다. 무함마드 무함마드는 570년 아라비아 반도에서 태어났다.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 고아가 되었고 삼촌의 손에서 자랐다. 무함마드는 대상(캐러밴)을 이끌고 사막을 가로질러 물건을 옮기면서 상인 무역을 배우며 자랐다. 사막을 통과하는 교역로는 짐승에게 물을 주기 위해 여러 오아시스에 들를 필요가 있었다. 이 오아시스 중 하나가 무함마드의 출생지인 메카였다. 상인들은 카라반을 이끌고 사막을 건너며 오아시스에 들른다 메카는 아라비아 반도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메카는 오아시스일 뿐만 아니라 운석일 가능성이 .. 2022. 9. 24.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비잔틴 제국 비잔틴 제국 비잔틴 제국은 살아남은 동로마 제국의 다른 이름이다. 로마를 포함한 로마 제국의 더 약한 서부 지역은 야만적인 침략자들에게 함락되었다. 로마 제국의 남은 부분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가 통치했다. 비잔틴 제국은 1,000년 더 버티다가, 마침내 1453년 오스만 튀르크에게 함락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 골든 혼 등 세 개의 수역으로 둘러싸인 반도에 건설되었다. 붐이라고 불리는 쇠사슬이 골든 혼을 가로질러 적함들이 그 지역으로 항해하는 것을 막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잔틴 제국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여겼지만, 동방은 서방의 라틴보다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말하고 그리스 스타일의 옷을 입었다. 황제와 황후는 값비싼 슬리.. 2022. 9. 24.
이란 역사 연대표 - 몽골의 정복 역사는 언제나 인류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다. 과거 문명을 통해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더 발전되고 경험이 풍부한 방법으로 인도한다. 그러한 고대 문명의 기초와 원리는 더 나은 미래와 삶의 방식을 결론짓는 최고의 기술이다. 인류 문명과 농업의 기원은 물론 비문과 부조나 무덤의 형태로 된 기록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 이 섹션은 문서화된 기록만을 기반으로 한다. 여러분 앞에 놓인 연구는 고대사의 고고학적, 역사적 발견 및 증거에 따라 가장 정확하고 최신적이며 과학적인 문서이다. 이 섹션에는 요약된 역사 연대표가 포함되어 있다. 페르시아는 고대에는 학문적 지식의 강국이었다. 그들은 천문학, 의학, 수학, 문학, 철학 분야의 리더였다. 수천 년에 걸친 침략과 정복 동안, 페르시아인은 그것을 견뎌내고 침략.. 2022. 9. 11.
이란 역사 연대표 - 이슬람 시대 역사는 언제나 인류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다. 과거 문명을 통해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더 발전되고 경험이 풍부한 방법으로 인도한다. 그러한 고대 문명의 기초와 원리는 더 나은 미래와 삶의 방식을 결론짓는 최고의 기술이다. 인류 문명과 농업의 기원은 물론 비문과 부조나 무덤의 형태로 된 기록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 이 섹션은 문서화된 기록만을 기반으로 한다. 여러분 앞에 놓인 연구는 고대사의 고고학적, 역사적 발견 및 증거에 따라 가장 정확하고 최신적이며 과학적인 문서이다. 이 섹션에는 요약된 역사 연대표가 포함되어 있다. 페르시아는 고대에는 학문적 지식의 강국이었다. 그들은 천문학, 의학, 수학, 문학, 철학 분야의 리더였다. 수천 년에 걸친 침략과 정복 동안, 페르시아인은 그것을 견뎌내고 침략.. 2022. 9. 4.
오스만 제국 역사 지도 - 3편 국가의 재건 1413-1421년 메흐메트 1세 술탄 바예지드 1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오스만 통치권을 두고 형제들과 싸웠다. 룸 지방에서 시작하여 1413년 오스만을 재통합하고 1421년에 사망할 때까지 아나톨리아와 루멜리아(유럽 영토)를 통치했다. "복원자"로 불리는 그는 아나톨리아에서 중앙 권위를 재건했고, 1415년 왈라키아를 정복하여 유럽에서 오스만 세력을 확대했다. 1416년 갈리폴리 해전에서 베네치아 함대에 술탄의 함대가 격파당했다. 1512년까지 오스만의 확장. 앙카라 패전 이후 아나톨리아의 많은 지역(가로 줄무늬 지역)이 오스만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전의 튀르크 공국으로 돌아갔다. 메흐메트의 통치가 시작된 후 포로로 잡혀갔던 그의 형제 무스타파가 나타나 영토 분할을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여 전투가.. 2022. 6. 6.
오스만 제국 역사 지도 - 2편 좌절과 내홍 1389-1402년 바예지드 1세 크리스토파노 델알티시모가 묘사한 바예지드의 초상화. 1360년경 태어난 바예지드는 1389년부터 1402년까지 오스만 술탄으로 있으면서 영토를 확장한 속도로 인해 이을드름(번개)이라는 별칭을 가졌고, 술탄이 룸(Sultan-i Rûm) 칭호를 채택했다. 룸은 로마 제국의 옛 이슬람식 이름이다. 1396년 니코폴리스(오늘날 불가리아 니코폴)에서 십자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었으며 1403년 3월에 사망하자 오스만에서 내전(인테르 레그눔)이 발발했다. 1389년의 오스만 술탄국. 아버지 무라트 1세가 죽은 뒤 술탄이 된 바예지드는 공격에 분노하여 모든 세르비아 포로를 .. 2022. 5. 30.
오스만 제국 역사 지도 - 1편 건국 술탄들 1263년경의 지중해 동부. 진녹색은 1300년대 오스만의 영토를, 녹색 점선은 1326년까지 정복한 지역을 나타낸다. 연두색은 튀르크인의 땅이며 비잔틴 제국은 1204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이후 라틴제국 및 여러 계승국으로 분열되었다가 1261년 막 회복한 상태였다. 1299년경-1323/4년 오스만 1세 1563년에 묘사된 오스만의 세밀화. 오스만 가지는 오스만 공국(또는 토후국)의 창시자이지만 역사적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의 통치기에 기록된 문헌은 없으며 그의 생애는 15세기까지 기록되지 않았다. 13세기 후반에 등장한 많은 베이리이(공국) 중 하나였고 소아시아 북부 비티니아 지역에 위치하여 허약한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기에 좋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스만의 치세에 정복한 영역. 13세.. 2022. 5. 23.
비잔틴 경제의 이해 : 중세 강국의 몰락 로마인의 후계자로서, 비잔틴 제국은 중세 시대에 가장 발전된 경제 중 하나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엄청난 부는 13세기에 극적으로 무너졌다. 284년 로마 제국의 첫 분할 때부터, 동방 또는 '비잔틴' 제국으로 알려진 곳은 경제 강국이었다. 선진적인 국가 세금 체계와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무역 연결을 통해 비잔틴 경제는 중세까지 중요한 위치를 유지했고, 막대한 부와 선망의 이미지를 투영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재앙으로 판명되었고, 비잔틴 제국은 결코 회복되지 못한 경제적 쇠퇴에 빠졌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기 전날, 한때 위대했던 비잔틴 제국은 사실상 궁핍했고, 예전 영광의 초라한 겉모습만 있었다. 비잔틴 농업 비잔틴 제국의 초기 경제력은 주로 토지에 기반을.. 2022.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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