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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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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스라엘] 호세아 호세아("구원하신다"라는 의미)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열아홉 번째이자 마지막 왕이며 엘라(북이스라엘 왕 엘라와 동명이인)의 아들로 BC 732-722년에 통치했다. 왕좌를 차지 아시리아 기록은 그가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에 대한 성경 기록을 확인시켜준다. 베가 치하의 북왕국은 아람 다마스쿠스의 르신과 동맹을 맺고 유대 왕을 아시리아 대항군에 합류하도록 강압했지만 아하스 치하의 유다는 아시리아의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에게 충성을 바쳤다. 베가의 군대 대장이었던 호세아는 베가를 죽이고 아시리아 쪽으로 돌아섰다. 티글라트 필레세르는 보상으로 호세아를 작게 축소된 에브라임(여기서는 북부 왕국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의 왕으로 삼았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의 비문에서 전임자가 전복된 후 호세아가 왕이 된 것을 기록했.. 2021. 2. 10.
[북이스라엘] 베가 베가는 르말랴의 아들로 북이스라엘의 열여덟 번째 왕이지 마지막에서 두 번째 왕이었다. 그는 군대 대장의 위치에서 브가히야 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베가는 유다 왕 웃시야의 52년에 왕이 되어 20년 동안 통치했다. 그의 통치 2년에 요담이 유다의 왕이 되어 16년 동안 통치했으며 베가 통치 17년에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계승했다. 학자들은 베가는 BC 752년 길르앗에서 왕이 되어 북이스라엘과 경쟁했으며 BC 740년 경에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베가스는 BC 740년에 브가히야를 죽이고 732년에 죽었다. BC 732년 호세아가 왕이 된 것은 아시리아 연대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베가가 아람 왕 르신과 연합하여 유다 왕 아하스를 공격했을 때, 아하스는 아시리아 왕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에게 .. 2021. 2. 9.
[북이스라엘] 브가히야 브가히야("야훼가 눈을 여셨다"라는 의미)는 북이스라엘의 열일곱째 왕이었고 므나헴의 아들이자 가디 가문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왕이었다. 그는 수도 사마리아에서 통치했다. 브가히야는 유다 왕 웃시야 50년에 왕이 되었으며 2년간(BC 742-740년 경) 통치했다(왕하 15:23). 그는 여로보암의 죄라고 불리는 여로보암의 행위를 계속했다(왕하 15:24). 2년의 통치 후 브가히야는 사마리아의 왕실 성채에서 길르앗 출신 50명의 도움을 받은 자신의 최고 장교 중 한 명인 르말야의 아들 베가에 의해 암살당했다(왕하 15:25). 베가가 브가히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 2021. 2. 9.
[북이스라엘] 므나헴 므나헴("위로하다"라는 의미)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열여섯 번째 왕이었다. 그는 가디의 아들이자 가디 가문 또는 므나헴 가문으로 알려진 왕조의 창시자였다. 어떤 사람들은 가디가 갓 지파의 후예라고 추측했다. 성경에서 므나헴의 10년 통치는 왕하 15:14-22에 나와 있다. 살룸이 사마리아에서 스가랴에 대해 음모를 꾸며 암살한 뒤 왕국의 왕좌에 앉았을 때 살룸처럼 스가랴의 군대의 대장을 맡고 있었던 므나헴은 왕을 살해한 약탈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므나헴은 서쪽으로 약 6마일 떨어진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진군하여 사마리아를 포위했다. 그는 그 도시를 점령하고 한 달 동안 통치한 살룸(왕하 15:13)을 죽이고 왕좌에 앉았다(왕하 15:14). 후대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북이스라엘 군대의 장.. 2021. 2. 9.
[북이스라엘] 살룸 살룸("응보"라는 의미, BC 752)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열다섯 번째 왕이자 야베스의 아들이었다. 성경에서 원래 스가랴 왕의 군대의 대장인 살룸은 "스가랴를 모반하여 백성 앞에서 쳐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왕하 15:10). 그는 스가랴 군대의 또 다른 대장인 므나헴이 일어나 살룸을 죽이기 전에 (왕하 15:14-17) "사마리아에서 한 달 동안"(왕하 15:13) 통치했다. 그 후 므나헴이 살룸을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 2021. 2. 9.
[북이스라엘] 스가랴 스가랴("여호와가 기억하셨다"라는 의미)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열네 번째 왕이자 여로보암 2세의 아들이다. 스가랴는 유다 왕 아사랴 38년에 사마리아에서 북이스라엘 왕이 되어 BC 753년부터 752년까지 통지했다(왕하 15:8). 그의 통치에 대한 이야기는 열왕기 하(왕하 15:8-12)에 간략하게 나와 있다. 성경에 따르면 스가랴는 여로보암 이후 북이스라엘의 왕들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스가랴는 자기 군대의 대장 살룸이 그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기 전까지 불과 6개월 동안 북이스라엘을 통치했다. 이것은 그의 후손 4대를 거친 예후의 왕조를 끝내고 왕하 10:30의 예언을 성취시켰다. 출처 : 위키피디아 2021. 2. 9.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여로보암 2세는 요아스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북이스라엘 왕국의 열세 번째 왕이며 BC 8세기에 41년 동안 통치했다. 그의 통치는 유다의 왕 아마샤(왕하 14:23) 및 웃시야(아사랴로도 불림)(왕하 15:1)와 동시대였다. 그는 BC 793-782년 동안 요아스와 함께 통치하였고 이후 BC 782-753년까지 단독으로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 그는 아람을 이기고(왕하 14:26, 27) 다마스쿠스를 정복하고(14:28) 이스라엘을 "하맛의 평야에서 아라바의 바다(사해)까지" 이전의 한계까지 확장했다. 고고학적 증거는 그의 통치가 북이스라엘 왕국이 아직 알지 못했던 가장 번영했던 통치에 대한 성경 기록을 확인시켰다. BC 8세기 말까지 이스라엘 영토는 전체 레반트에서 가장 밀집된 지역이었으며 인구는 약.. 2021. 2. 8.
[북이스라엘] 요아스 이름이 "야훼가 주셨다"라는 뜻의 요아스는 북이스라엘 왕국(사마리아)의 열두 번째 왕이자 여호아하스의 아들로 16년(BC 798-782) 동안 통치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북이스라엘 왕국은 아람 왕 하사엘의 침략에 시달리며 왕국의 영토는 줄어들고 있었다. 그의 통치에 대한 성경적 설명 열왕기 하에 따르면 요아스는 금송아지 숭배를 용납한 것에 대해 여호와의 눈에 죄를 지었고 악을 행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여호와를 경배했다. 그는 16년 동안 이스라엘 왕으로 통치했으며 유다 왕국과의 전쟁을 포함한 결정적인 전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다(왕하 13:10, 12). 엘리사의 죽음 요아스는 죽게 될 병을 앓고 있던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러 갔다. 그는 선지자 엘리사를 영예롭게 안고 죽는 동안 침대 .. 2021. 2. 7.
[북이스라엘] 여호아하스 여호아하스("야훼께서 붙잡으셨다"를 의미)는 북이스라엘의 열한 번째 왕이자 예후의 아들이었다(왕하 10:35, 13:1). 그는 17년(BC 814-798) 동안 통치했다. 성경적 이야기 열왕기 하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야훼 앞에서 악을 행했고 그의 백성은 여로보암 집의 종교적 관습을 따랐으며, 여기에는 사마리아에 있는 아세라(페니키아와 아람의 여신)의 숭배를 포함했다. 아람의 하사엘 및 벤하닷 왕이 그를 이겼다(왕하 13:1-3). 여호아하스는 이스라엘을 아람의 압제에서 구해줄 구원자를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했고, 이스라엘을 위해 이름 없는 구원자를 주셨다. 아람인들은 패배했지만 여호아하스의 군대는 기병 50, 전차 10대, 보병 10,000명으로 줄었다(왕하 13:4-7). 출처 : 위키피디아 2021. 2. 7.
[북이스라엘] 예후 예후는 여로보암 1세 이후 아합의 집을 멸절시킨 것으로 유명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열 번째 왕이었다. 그는 님시의 손자이자 아마도 오므리의 증손자인 여호사밧의 아들이었다. 그의 통치는 28년(BC 841-814년 경) 동안 지속되었다. 왕으로 선포 전임자 여호람은 그의 누이 아달랴의 아들인 조카, 유다 왕 아하시야와 함께 참전한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회복을 위해 이스르엘로 돌아왔다. 열왕기에 따르면 선지자 엘리사는 제자들 중 한 명에게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당시 군 사령관이었던 예후를 동료들과 분리하여 그곳의 골방에서 예후를 왕으로 삼는 기름을 붓고 아합의 집에 대한 신성한 심판의 대리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설명하도록 명했다. 제자는 이 지시를 따랐고 완료 후 도망쳤다. 예후는 처음에 그 제자.. 2021. 2. 6.
[북이스라엘] 여호람 여호람(BC 852-841년 경)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아홉 번째 왕이었다(왕하 8:16, 왕하 8:25-29). 그는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이자 아하시야와 아달랴의 형제였다. 왕하 8:16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여호람 5년에 (또 다른) 여호람이 유다의 왕이 되었다. 같은 장에서 이스라엘의 여호람과 유다의 여호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통치 여호람은 유다 왕 여호사밧 18년에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하여 12년 동안 통치했다(왕하 3:1). 전임자들과 달리 여호람은 바알을 숭배하지 않았고 아마도 아합이 자신과 이세벨의 숭배를 위해 이스르엘에 있는 궁전 근처에 세웠던 바알의 기둥을 제거했다(왕하 3:2). 그러나 왕하에서는 그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을 죄로 이끌었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다"고 말한.. 2021. 2. 6.
[북이스라엘] 아하시야 아하시야(BC 852-851)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여덟 번째 왕이자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이었다. 왕상 22:52에서 그의 아버지 아합과 그의 어머니 이세벨의 길을 따르고 이스라엘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죄를 짓게 한 것에 대해 그를 비난했다. 통치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모압 사람들은 그의 권위에 반발했다(왕하 3:5-7). 이 사건은 모압어로 쓰인 광범위한 비문인 메사 석비에 기록되어 있다. 아하시야는 무역 선단을 만들기 위해 유다 왕 여호사밧과 협력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여호사밧이 아하시야(이스라엘 왕국에서 그의 아버지 아합과 어머니 이세벨과 같은 악을 행하고 있었음)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배들은 난파되어 항해하지 못했다(대하 20:35-37). 아하시야가 궁전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 2021. 2. 6.
[북이스라엘] 아합 아합은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의 일곱 번째 왕으로 오므리 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이며 티레의 이세벨의 남편이었다(왕상 16:29-34). 히브리 성경에서 특히 이세벨이 종교 정책에 대한 영향과 나봇이 돌에 맞아 죽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용인한 아합은 사악한 왕으로 등장한다. 아합의 존재는 역사적으로 성경 외에도 기록되어 있다. 아시리아의 샬마네세르 3세는 BC 853년 그가 카르카르 전투에서 12명의 왕들의 동맹을 물리쳤다고 기록했다. 그중 하나가 아합이었으며 또한 메사 석비의 비문에도 언급된다. 아합은 유다의 아사 왕 38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열왕기 상에 따르면 22년(BC 873-852) 동안 통치했다. 통치 오므리 왕은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메사 석비의 본문에 .. 2021. 2. 5.
[북이스라엘] 오므리 오므리(BC 885-873)는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여섯 번째 왕이었다. 그는 북이스라엘 왕국을 확장한 성공적인 군사 정복자였다. 오므리 가문의 다른 군주는 아합, 아하시야, 여호람, 아달랴이다. 단 7일만 통치했던 전임자 시므리 왕처럼 오므리는 자신의 부족 출신에 대한 언급 없이 성경에 언급된 두 번째 왕이다.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은 그가 잇사갈 족속에 속했다는 것이다. 오므리의 혈통에 대해서는 성경에 아무것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아모리어, 아랍어 또는 히브리어일 수 있다. 오므리는 사마리아의 건설하여 그의 수도로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에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취해진 다른 행동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앞선 모든 왕들보다 더 악한 것으로 묘사된다. 통치.. 2021. 2. 4.
크레타 에트 키레나이카 크레타와 키레나이카는 BC 67년에 설립된 로마 제국의 원로원 속주로 크레타 섬과 현재 리비아의 키레나이카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아피온의 의지와 로마의 키레나이카 통치 헬레니즘 왕국 키레나이카의 마지막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아피온은 BC 96년에 자녀 없이 사망했을 때 그의 왕국을 로마 공화국으로 유증 했다. 로마는 프톨레마이오스 아피온으로부터 이 상속을 쉽게 받아들였지만 직접 지배하기보다는 행정권을 지역 통치자에게 맡기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BC 70년대에 이르러 유대인 정착민들의 시민 봉기는 이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기 시작했고 원로원은 조치를 취해야 했다. BC 74년 그들은 하급 관리인 코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를 파견하여 공식적으로 키레나이카를 로마의 영토로 합병하고 질서를 회복했다. 원.. 2021. 2. 3.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는 현재 프랑스 남부의 랑그도크루시용과 쁘호벙스(프로방스)에 위치한 로마의 속주이다. 이 지역은 알프스 북부의 첫 번째 로마 속주인 프로빈키아 노스트라("우리 지방")와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 키살피나와 구별되는 갈리아 트란살피나로도 알려져 있다. BC 2세기 후반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 경계는 대략 남쪽의 지중해와 서쪽과 북쪽의 쎄벤느와 알프스에 의해 정의되었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의 서부 지역은 셉티마니아로 알려졌다. 명명 갈리아 트란살피나는 BC 118년 해안에 세워진 로마 식민지 콜로니아 나르보 마르티우스(현재의 나르본에 위치한 구어체로 나르보로 알려진)의 새로 설립된 주도를 따라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로마인들은 이 곳을 프로빈키아 노스트라("우리 지방".. 2021. 2. 3.
아시아 비잔틴 시대에 프리기아라고 불리는 로마의 아시아 또는 아시아나 속주는 공화국 후기에 추가된 행정 구역으로 프로콘술(집정관 경력자) 총독이 관리하는 원로원 속주였다. 211년 로마 제국의 재편성에서도 그 통치 방식은 변경되지 않았다. 배경 "아시아"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Ἀσία에서 유래했으며 원래는 에게 해 동쪽 해안의 아수와를 점령한 리디아인들에게 적용되었다. 리디아에서 그리스에 가까운 해안에 사용했지만 점차 리디아(오늘날 터키의 북서부)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로마의 아시아 속주는 리디아 왕국의 면적을 거의 정확히 차지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단어는 동쪽의 미지의 지역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 대왕은 BC 190년 로마인들이 역사적인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그의 군대를 분쇄했을 .. 2021. 2. 3.
아프리카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는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한 후 BC 146년에 만들어진 북아프리카 해안의 로마 속주이다. 대략 현재의 튀니지 영토, 알제리의 북동쪽, 그리고 시드라 만을 따라 리비아 서부 해안으로 구성되었다. 이곳에는 이집트를 제외한 북아프리카의 원주민이며 라틴어로 마우리인이라 불려진 베르베르 사람들이 살았다. BC 9세기에 페니키아인은 해운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지중해를 따라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그중 카르타고는 BC 8세기부터 로마 공화국에 정복될 때까지 지배권을 얻었다. 로마 제국 서부에서 이탈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부유한 속주 중 하나였다. 카르타고 시를 제외하고 이 속주의 다른 대규모 정착지는 로마 제국 후기의 속주인 비자케나의 주도 하드루메툼(현재의 수스, 튀니지)과 .. 2021.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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