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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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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역사 지도 - 4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BC 27-AD 14 아우구스투스 시민관을 쓰고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흉상. 로마의 초대 황제. 그는 팍스 로마나로 알려진 상대적으로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로마 세계는 제국의 국경에서 계속된 확장 전쟁과 황위를 둘러싼 1년 간의 내전 외에는 2세기 이상 대규모 분쟁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이 끝난 뒤 원로원, 행정부, 입법부에 정부 권한을 부여하면서 공화국의 외관을 복원했지만 원로원으로부터 군 최고사령관, 호민관, 감찰관의 종신 재직권을 부여 받음으로써 독재적 권위를 유지했다. 모호성은 그가 선택한 이름에서 볼 수 있는데 자신을 프린켑스 키비타티스(제1시민)로 부르며 군주제 칭호를 묵시적으로 거부하고 고대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를 채택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 달마티아, 판노니아, 노리쿰,.. 2021. 8. 17.
로마 제국 역사 지도 - 3편 제국으로 가는 길 BC 60-53년 제1차 삼두정치 BC 62년 동방 원정에서 돌아온 폼페이우스가 맺은 협정을 원로원이 비준해주지 않았지만 그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 61년 히스파니아 총독직에서 돌아온 카이사르가 크라수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로 알려진 비공개 협정을 맺었다. 59년 집정관에 선출된 카이사르는 협정을 비준하였고 그는 향후 5년간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갈리아 키살피나, 일리리아 총독을 맡게 되었다. 56년 루카 회담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55년도 집정관직을 약속받았고 54년도 부임지로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를, 크라수스는 시리아를 배정받았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임기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50년까지 연장되었다. BC 58-50년 갈리아 전쟁 비레비스타스의 다키아 왕국이 로마로 향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카이.. 2021. 8. 16.
로마 제국 역사 지도 - 2편 로마의 헤게모니 BC 135-132년 제1차 노예 전쟁 BC 135년 예언자로 자처한 시리아 출신의 노예 에우누스가 400명의 노예와 함께 엔나를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킬리키아 출신의 노예 클레온이 남쪽 해안의 아그리겐툼을 습격해 주민들을 학살한 뒤 에우누스에 합류하여 지휘관이 되었다. 7만 명에 달했던 반란군은 집정관 푸블리우스 루필리우스에게 진압되었다. BC 113-101년 킴브리 전쟁 킴브리, 투에토네스, 암브로네스, 티구리니의 4개 부족이 로마 영토에 이주하면서 벌어졌다. 유구르타 전쟁과 킴브리 전쟁을 통해 영감을 받은 마리우스는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아쿠아이 섹스티아이와 베르켈라이에서 로마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이들은 거의 소멸되었다. 살아남은 소수는 노예가 되거나 유틀란트로 도주했다. BC 91-87.. 2021. 8. 15.
로마 제국 역사 지도 - 1편 로마의 부상 BC 753년 로마의 건국 로물루스가 팔라티누스 언덕에 도시를 세운 뒤 BC 509년까지 로물루스를 포함하여 7명의 왕이 다스렸다. 에트루리아인 로마가 설립되었을 당시 이탈리아 중부는 에트루리아인의 세력이 강성했다. 왕정 시대에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부터 마지막 왕(7대)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까지 에트루리아계였다. BC 500년경 로마의 공화국 전환 당시 이탈리아 반도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는 그리스 식민 도시들을 지칭하는 마그나 그라이키아가 있었고 로마 주변과 이남 지역은 여러 부족들이 통합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카르타고는 에트루리아와 동맹을 맺고 그리스 세력과 충돌했다. BC 390년경 켈트족의 침공 BC 400년경 이탈리아의 모습. .. 2021. 8. 13.
고대 페르시아인의 시원함을 유지하는 방법 고대 이집트에서 페르시아 제국까지, 바람을 잡는 기발한 방법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배기가스가 없는 냉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윈드캐처"가 다시 한번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란 중부의 사막에 있는 도시 야즈드는 오랫동안 창의적 독창성의 중심지였다. 야즈드에는 야흐샬(yakhchāl)이라고 불리는 지하 냉각 구조물, 카나트(qanats)라고 불리는 지하 관개 시스템, 그리고 심지어 미국의 우편 서비스를 2,000년 이상 앞선 피라다지슈(pirradaziš)라는 물류망이 포함되어 있는 고대 공학의 경이로운 체계가 자리 잡은 곳이다. 야즈드의 고대 기술 중에는 윈드캐처(windcatcher, 바람을 잡아두는 구조물), 즉 페르시아어로 바드지르(bâdgir)가 있다. 이.. 2021. 8. 12.
네아르코스 네아르코스(BC 360-300년 경)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에 있던 해군 장교 중 한 명이다. 그는 BC 326-32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캠페인에 이어 인더스 강에서 시작하여 페르시아만을 지나 티그리스 강 하구에서 끝난 것으로 알려진 원정 항해로 유명하다. 성장기 크레타의 라토 출신으로 안드로티모스의 아들이며 그의 가족은 필리포스 2세의 치세 중 어느 시점에 마케도니아 암피폴리스에 정착했으며 (BC 357년 필리포스가 도시를 점령한 이후로 추정해야 함) 아마도 어린 소년이었을 것이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에리기오스, 그리고 다른 소년 시절 친구들처럼 알렉산드로스보다 확실히 나이가 더 많았기 때문에 안드로티모스가 마케도니아에 온 시기를 따지면 크레타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네아르코스는 .. 2021. 8. 9.
[일본 문화] 와(和) 와(和)는 일반적으로 영어로 "조화"로 번역되는 일본 문화의 개념이다. 이것은 구성원들이 개인적인 이익보다 조화로운 공동체의 지속을 선호하는 사회 집단 내의 평화로운 통합과 순응을 의미한다. 일본의 한자인 간지 문자 와(和)는 원래 사실적으로 경멸적 표기인 왜/와(倭, "난쟁이/복종하는 사람들")를 대체하는 "일본, 일본인"의 이름이기도 하다. 와는 일본 사회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전통적인 일본의 가족 가치에서 유래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와의 이상을 깨뜨리는 개인은 상관의 질책이나 공공연히 또는 은밀하게 동조하는 가족 또는 동료들의 암묵적인 반대가 있게 된다. 일본 사회에는 주로 와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계층 구조가 존재한다. 당의 노선이 달라 민중과 불화가 생겨도 일반적으로 공동체.. 2021. 8. 8.
카리얀다의 스킬락스(Scylax of Caryanda) 카리얀다의 스킬락스는 BC 6세기 말과 5세기 초의 그리스 탐험가이자 작가이다. 후대의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에 의해 종종 인용되거나 제시되긴 했지만, 그의 저술은 소실되었다. 스킬락스의 주항기는 사실 그가 기록한 것이 아니다. 소위 가짜 스킬락스의 주항기는 약 BC 330년대 초에 플라톤 이후의 아카데미와 또는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 페리파토스(리케이온)의 영역에서 활동한 알려지지 않은 저자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탐험 스킬락스는 소아시아의 이아소스와 가까운 섬에 있는 작은 도시인 카리얀다 출신이다. 그는 아마도 카리아인으로 그리스어와 친숙하고 그의 저술에 사용했을 것이다. 스킬락스에 대해서는 후대의 그리스 작가들이 전하는 얼마 되지 않는 정보 외에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헤로도토스는 그를 이오니아 .. 2021. 8. 7.
갈리아 벨기카 갈리아 벨기카("벨기에 갈리아")는 오늘날 주로 프랑스 북부,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독일의 일부에 해당하는 로마 갈리아의 북동부에 위치한 로마 제국의 속주였다. BC 50년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 중 정복한 이후 이곳은 갈리아의 세 지역(트레스 갈리아이) 중 하나가 되었고, 나머지 두 지역은 갈리아 아퀴타니아와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이다. 공식적인 로마의 속주는 나중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BC 22년에 설립되었다. 이 속주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부족 연합인 벨가이의 이름을 따왔지만 트레베리족, 메디오마트리키족, 레우키족, 세콰니족, 헬베티족과 그 외 영토도 포함되었다. 마른 강과 센 강에 의해 형성된 벨기카의 남쪽 경계는 카이사르가 구분한 벨가이와 켈트 갈리아 사이의 문화적 경계.. 2021. 8. 6.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갈리아 루그두넨시스는 로마 제국의 속주로, 예전에는 켈티카로 알려진 켈트족 영역의 일부였으며, 지금은 프랑스 지역이다. 속주는 아마도 이탈리아 서쪽 로마 유럽의 주요 도시이며, 중요한 제국의 조폐국이 있는 주도 루그두눔(오늘날의 리옹)에서 이름을 따왔다. 루그두눔 외곽에는 로마와 아우구스투스 숭배를 기리기 위해 대표자들이 만나는 갈리아의 성소가 있었다. 역사 갈리아 정복(BC 58-50년)을 기술한 데 벨로 갈리코(De Bello Gallico)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미 로마의 속주였던 갈리아 남부의 프로빈키아 노스트라와 갈리아의 다른 세 지역, 즉 아퀴타니, 벨가이, 그리고 켈타이라고도 알려진 갈리를 구분했다. 갈리의 영역은 갈리아 벨기카와 경계를 이루는 북동부의 센 강과 마른 강에서 갈리아 아퀴타.. 2021. 8. 5.
갈리아 아퀴타니아 갈리아 아퀴타니아는 아키텐 또는 아퀴타니아 갈리아로 알려진 로마 제국의 속주였다. 이곳은 현재의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오늘날의 아키텐 지역에 이름을 붙였다.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와 접해 있었다. 아퀴타니아의 부족들 14개의 켈트 부족과 20개 이상의 아퀴타니아 부족이 남쪽의 피레네 산맥 북쪽 비탈에서 북쪽의 리게르(루아르) 강까지 이르는 지역을 차지했다. 아퀴타니족은 20개 이상의 부족이 있었지만, 그들은 수가 적고 평판이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부족은 바다를 따라 거주했고, 나머지 부족은 내륙과 켐메누스 산맥의 정상과 텍토사게스까지 있었다. 갈리아 코마타라는 이름은 종종 더 먼 갈리아의 세 속주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2021. 8. 4.
일리리쿰 - 상(上) 일리리쿰은 BC 27년부터 베스파시아누스 치세(AD 67-79년)까지 존재했던 로마의 속주였다. 속주는 일리리아/달마티아와 판노니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리리아는 아드리아 해의 동쪽 해안을 따라 있는 지역과 내륙의 산지를 포함했다. 이 속주가 만들어지면서 달마티아라고 불리게 되었다. 판노니아가 북쪽에 있는 반면, 달마티아는 남쪽에 있었다. 일리리아/달마티아는 드린 강(오늘날 알바니아 북부)에서 이스트라 반도(크로아티아) 그리고 북쪽의 사바 강까지 뻗어 있었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알바니아 북부, 세르비아, 코소보,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해안과 거의 일치한다. 판노니아는 일리리아/달마티아 산지에서 다뉴브 강의 서쪽 굽이까지 북쪽에 위치한 평원으로, 오늘날의 보이보디나(.. 2021. 8. 2.
루시타니아 루시타니아 또는 히스파니아 루시타나는 고대 이베리아 로마의 속주로, 오늘날 포르투갈(도루 강 이남)과 스페인의 일부(오늘날 엑스뜨레아두라 광역 자치주와 살라망카 주)였다. 그곳은 루시타니아인 또는 루시타니아 민족(인도 유럽어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주도는 에메리타 아우구스타(스페인 메리다)였으며,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기 전에 공화국 시절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속주의 일부였다. 로마인은 BC 2세기 중반에 처음으로 이 지역에 왔다. BC 155년부터 139년까지 루시타니아 부족들과의 전쟁이 이어졌다. BC 27년에 속주가 만들어졌다. 루시타니아는 포르투갈의 대체 명칭으로 종종 사용되었다. 이름의 유래 루시타니아인(로마 속주에 이름을 부여한)의 이름의 어원은 아직 불명확하다. 대중적인 어원은 그 이.. 2021. 8. 1.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종종 줄여서 바이티카로 불리는 히스파니아 바이티카는 히스파니아(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세 개의 로마 속주 중 하나였다. 바이티카는 서쪽으로 루시타니아, 북동쪽으로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와 접경하고 있었다. 바이티카는 711년까지 서고트 치하에서 히스파니아의 기본적인 분할 중 하나로 남아 있었다. 바이티카는 8세기 무어인 통치하의 알 안달루스의 일부였으며 대략 오늘날의 안달루시아와 일치한다. 명명 라틴어 바이티카(Baetica)는 과달키비르 강의 로마식 이름인 바이티스(Baetis)의 형용사 형태로, 이 강의 비옥한 계곡이 이 지방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를 형성했다. 역사 로마화 이전, 바이티카가 될 산간 지역은 정착한 여러 이베리아 부족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켈트족의 영향은 북쪽의 켈티베리아인만큼 .. 2021. 7. 29.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는 히스파니아에 있던 세 개의 로마 속주 중 하나였다. 그것은 오늘날 포르투갈의 노르트 지역과 함께 오늘날 스페인의 북부, 동부, 중부 영토의 대부분을 포함했다. 현재 안달루시아라고 불리는 스페인 남부는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속주였다. 서쪽의 대서양 연안에는 부분적으로 오늘날의 포르투갈과 일치하는 루시타니아 속주가 있었다. 역사 페니키아인과 카르타고인은 BC 8세기에서 6세기에 지중해 연안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리스인도 나중에 해안을 따라 식민지를 건설했다. 로마인은 BC 2세기에 도착했다. 타라코넨시스라고 불리는 로마 제국의 속주는 BC 27년 아우구스투스의 재편으로 공화국 후기에 총독이 통치하던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를 대신했다. 주도는 타라코(오늘날 카탈루냐주 타라고나)였다. 타.. 2021.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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