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고대지중해16 로마 제국 - 야만인의 침공 제국의 서부가 약화되다서로마 제국은 더 약하고 가난한 절반이었다. 410년, 알라리크와 야만인 집단 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했다. 로마가 외국 군대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보다 800년 앞선 초기 공화정 시대의 갈리아인 이래 처음이었다. 국경을 지킬 수 없게 된 서로마 제국은 많은 야만인에게 짓밟혔다.451년, 아마 모든 야만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훈족의 아틸라는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에서 벌어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로마군과 서고트족에게 패했다. 대부분의 야만인이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훈족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야만인 집단 중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카탈라우눔의 로마군 지도자는 아틸라의 어린 시절 친구인 아이티우스였다. 아이티우스는 어린 시절의 일부를 훈족의 야만적인 진영에서 인질로 지내며 보냈다.. 2022. 11. 29. 로마 제국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황제가 되었다. 그는 로마가 필요로 하는 것, 안정과 내전의 종식, 실업자들을 위한 일자리를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주었고, 그는 어떤 왕이나 독재자 못지않게 강력했지만, 원로원이 로마 제국의 많은 부분을 통치하도록 허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나는 로마를 벽돌의 도시로 발견하고 대리석의 도시로 남겼다"라고 말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를 재건하고 미화하여 많은 실직 로마인들을 그 과정에서 일하게 했다.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대제국을 통치했다. 그가 이 거대한 제국을 통해 이룬 평화는 무역과 번영의 증가로 이어졌다. 그는 라틴어와 로마 문화를 전파했다. 제국 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아우구.. 2022. 11. 28. 로마 공화정의 종식 -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그들이 로마 공화국을 구했기를 희망했다. 3월 15일, 그들은 카이사르의 절친한 친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도 죽이는 것을 고려했지만, 그를 위협으로 보지도 않았고 도살자로 등장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목표는 카이사르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제 안토니우스는 기회를 보아 로마의 군중에게 카이사르의 예복을 보여주며, 각각의 단검이 찌른 곳을 드러냈다. 카이사르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를 죽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도주했다.놀랍게도 카이사르의 종손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재산 대부분을 물려받았다. 당시 19세였던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재산을 주장하기 위해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항해했다. 아무도, 특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를 권력을 장악할 위협으로 보지 않았.. 2022. 11. 27. 로마 공화정 후기 그라쿠스 형제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병사들이 타국 전쟁에서 돌아와 그들이 떠나 있는 동안 농장이 부유한 로마인들에게 팔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더 이상 농장을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판매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인 것 같았다. 새로운 소유주들은 이 작은 농장들을 합쳐서 노예들이 일하는 "대농장"을 만들었다. 그래서 병사들이 그들의 땅을 잃을 정도로 나쁘지만 않다면, 새로운 소유주들은 그들이 땅을 경작한다고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수천 명에 달하는 실직 퇴역 병사들이 일자리를 찾아 로마 거리로 몰려들었다. 한때 자랑스러웠던 로마인의 대부분은 이제 정부의 지원금으로 존재했다.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부유한 평민이었다. 티베리우스는 무엇보다도 오래된 .. 2022. 11. 26. 제3차 포에니 전쟁 (BC 149-146) 대 카토. 그는 그리스 문화를 경멸했고, 카르타고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패한 후 그렇게 잘 해낸 것에 화가 났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했다.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의 작은 지역으로 축소되었고, 반면 로마는 카르타고의 많은 영토, 특히 이베리아(스페인)를 차지함으로써 확장되었다.이제 로마는 역사상 처음으로 병사들이 오랫동안 전장으로 멀리 나가 있어야 했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카르타고와의 평화가 이루어진 지금, 고국으로 돌아가는 이 병사들은 어떻게 되는가? 대부분은 농부였지만, 그들이 없는 동안 부유한 로마인들은 농장을 사들이고 노예를 이용하여 농장을 운영했다. 돌아온 참전용사들은 갈 곳도 일거리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찾아 로마로 몰려들었다. 이는 로마의 "승리를 거둔 .. 2022. 11. 25. 제2차 포에니 전쟁 (BC 218-201) 용병 전쟁 (BC 240-237년)카르타고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에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용병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했다. 로마는 전쟁 후 카르타고에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강요했고, 그래서 카르타고는 용병들에게 지불할 돈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용병들과 카르타고 사이의 지불에 대한 의견 불일치는 용병 전쟁으로 이어졌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위대한 카르타고 지도자인 하밀카르 바르카는 이제 아프리카로 돌아와 시칠리아에서 로마에 맞서 싸운 자신의 군대 일부였던 용병들과 싸웠다. 하밀카르는 성공했지만, 카르타고가 용병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로마는 코르시카 섬과 사르데냐 섬을 장악할 기회를 잡았다. 이는 카르타고의 주요 무역로 중 일부를 차단했고, 카르타고는 제국에 추가할 새로운 땅을 찾아야 했다. 로.. 2022. 11. 24. 제1차 포에니 전쟁 (BC 264-241)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분쟁이었다. 이는 BC 264년에 시작되어 241년까지 끝나지 않은 긴 전쟁이었다. 분쟁의 대부분은 시칠리아 섬이나 시칠리아를 둘러싼 바다에서 일어났다. 한때 로마는 카르타고와 매우 가까운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영토를 공격했다. 이 원정은 크산티포스라는 스파르타인이 카르타고 군대를 이끌고 그들의 조국을 방어했기 때문에 성공적이지 못했다. 카르타고는 원래 BC 800년경 페니키아인에 의해 정착되었다. 페니키아의 도시국가인 티레 출신의 디도 공주는 북아프리카 해안에 이 도시를 세웠다. 페니키아인은 주로 유리, 상아 조각품, 그리고 그들의 유명한 자주색 옷을 거래하는 위대한 선원이자 무역상이었다. 포에니("페니키아인, 티레의 보라색/진홍색"을 뜻하는 그리스어 '포이니키.. 2022. 11. 23.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헬레니즘 시대 BC 336-30년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로스의 즉위부터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까지) 헬레니즘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헬라스(Hellas)에서 유래했다. 그리스 시대는 그리스 문화가 순수하고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시기였다.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인이 외부인과 접촉하여 그들의 고전적인 문화가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문화와 혼합되어 혼합된 문화를 만들었던 시기였다.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는 이러한 문화의 혼합을 책임지고 있다. 마케도니아 왕국이 어떻게 그리스 세계를 지배했는지 이해하려면 우선 BC 371년 스파르타와 테바이 간의 레욱트라 전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파르타는 BC 404년에 아테네를 물리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끝냈다. 스파르타는 승리했지만.. 2022. 10. 30. 펠로폰네소스 전쟁 - 거대한 전쟁 (BC 431-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일련의 분쟁이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 동맹 또는 연합을 맺어 동맹국들을 전쟁에 끌어들였기 때문에, 이들 전쟁은 그리스 세계의 대부분을 포함했다. 아테네의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편에서 싸운 전쟁의 주요 출처이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지휘관 중 하나였던 BC 422년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배척되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라는 책을 썼다. BC 431년에서 404년까지 갈등은 "대전"으로 알려진 것으로 확대되었다. 그리스인에게 "대전"은 그리스 세계의 많은 지역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인, 페르시아인, 시칠리아인도 포함하는 세계대전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양측이 모두 잔학행위를 저지르는 등 추악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2022. 10. 29. 필리포스의 군사 개혁 필리포스는 군대를 창설하고 그리스인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전술을 도입함으로써 전통적인 전투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의 적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또한 사건이 증명했듯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군대 덕분에 페르시아, 박트리아, 인도인은 알렉산드로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필리포스가 기병대를 창설하기 전의 마케도니아 군대는 말과 갑옷 비용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귀족들에게 지원받았다. 반면 보병은 위험이 닥쳤을 때 급히 징집된 소작농으로 대부분 구성되었다. 이들은 훈련과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전투에 동원될 때 그들은 소와 마차를 가지고 농장을 떠나야 했고, 이는 결국 농작물 생산량과 생계에 악영향을 미쳤다. 왕국 국경에 있는 호전적인 부족이나 훈련된 호플리테스 그리스 군대와는 비교가 되.. 2021. 11. 30. 갈리아의 그리스 제국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은 오늘날 마르세유, 마살리아 주변의 갈리아 남부에 제국을 건설했다. 오늘은 그리스 해운 제국의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프랑스 남부 해안으로 이식된 프랑스 역사에서 흥미로운 사건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BC 800년 그리스 도시 국가 포카이아에서 시작된다. 포카이아는 터키의 아시아 지역으로 불리는 곳으로 아나톨리아의 서부 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터키의 북쪽 끝과 남쪽 끝의 중간쯤에 있다. 그 당시 아나톨리아 서부에는 에게 해를 누비며 건너온 그리스인이 거의 대부분 거주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히타이트와 같은 강력한 제국들이 생겨났지만, 아나톨리아 해안 동쪽의 제국들 대부분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부에 주목했고, 그 당시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그리스인에게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2021. 11. 15. 로마의 곡물 무역 곡물 무역은 단순히 로마 상인들에게 이익의 수단이 아니었다. BC 5년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는 32만 명의 남성 시민에게 곡물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그의 승리와 업적을 기념하는 비문에 기록했는데, 이는 바다와 육지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만큼 로마 시민들의 호의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빵과 서커스'의 시대가 시작되고, 로마 민중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많은 황제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 행위였다(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곡물을 빵으로 대체한 AD 3세기 전까지는 구운 빵이 배급되지 않았다). BC 1세기 말 로마는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곡물 공급원들인 시칠리아, 사르데냐, 아프리카를 통제하며 폼페이우스가 매우 조심스럽게 보호해 왔다. 한 가지 결과는 중부 이탈리아에서 곡물 .. 2021. 9. 4. 대서양을 향한 첫 항해 페니키아인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배를 만들고 대서양의 거친 물살을 견뎌냈다. 확실히, 그들 이전의 미노아인은 매우 활기차게 무역을 했고 신속하고도 잔인한 해군력으로 그들의 지중해 무역로를 지켰다. 날이 날카로운 청동 도구로 만든 그들의 배는 우아하고 튼튼했다. 편백나무로 만들어졌고, 반으로 자르고 하나로 겹쳐졌으며, 하얀 도색된 아마포의 크기가 널빤지를 가로질러 뻗어 있었고, 돛은 참나무 돛대에 매달렸으며, 속도를 보충하기 위해 노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낮에만 일을 했고 크레타에서 항해한 지 며칠 걸리지 않는 섬들 사이를 항해할 뿐이었다. 미노아인은 한 번도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넘어 영원한 어두운 바다의 부서지는 파도로 뛰어들지 않았다. 미노아인은 대부분의 경쟁 해양 세력과 마찬가지로 대서양을 .. 2021. 9. 3.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고대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놀라운 예술 및 건축 작품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독창성, 상상력, 순전한 노력에 대한 증거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의견 불일치, 파괴, 그리고 어쩌면 윤색에 대한 인간의 능력을 상기시켜준다. 고대 작가들이 "7대 불가사의"의 목록을 작성하자마자, 어떤 업적이 포함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논쟁의 장이 되었다. 최초의 목록은 BC 225년 비잔티움의 필로가 쓴 "7대 불가사의"라는 작품에서 따왔다. 결국, 사람의 손이 자연의 힘과 합쳐져서 불가사의 중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파괴했다. 게다가, 적어도 하나의 불가사의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7가지 모두 지구 초기 문명의 창의성과 기술의 놀라운 산물로서 계속 영감을 주고 찬사를 받고 있다... 2021. 9. 1. 고대 로마는 어디까지 퍼졌을까? 절정에 달했을 때 로마는 유럽과 중동에 걸쳐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BC 753년에 반신이기도 한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테베레 강에 로마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8세기 반 동안 양돈 농부들의 작은 마을에서 영국에서 이집트로 뻗어있는 지중해를 완전히 둘러싼 광대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로마 제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사력으로 이 땅들을 공격하여 정복했고, 그들이 스스로 다스리게 하면서 이 땅들을 유지했다.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대학의 역사학 교수이자 "필멸의 공화국 : 로마가 독재정에 빠진 이유"의 저자인 에드워드 J. 왓츠는 로마의 팽창에 대한 열망은 역사적 뿌리가 깊었다고 말한다. "왕들이 통치한 도시의 팽창에 대해 이야기하는 근원적으로 로마 선사시대, 신화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이 .. 2021. 8. 28. 이전 1 2 다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