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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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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이야기177

비잔틴 제국에 대해 모를 수도 있는 10가지 비잔틴 제국은 고대 말과 중세 시대에 로마 제국의 나머지 부분이었다. 여기에 비잔틴 제국에 대해 모를지도 모르는 것들이 있다. 1. 비잔티움은 BC 657년 메가라에서 온 그리스 식민지 개척자들이 세운 고대 그리스 도시이다. 이 도시는 AD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에 의해 비잔틴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재건되었고 그를 기리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2. 비잔틴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단 것과 디저트를 사랑했다. 비잔틴 사람들은 꿀과 계피를 곁들인 쌀 푸딩을 즐겨 먹었다. 3. 비잔티온은 메가라의 식민지 개척 지도자이자 도시의 설립자인 비자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비잔티움"의 형태는 그리스어 비잔티온을 라틴어로 표기한 것이다. 4. 거의 200년에 이르는 가장 긴 비잔틴 .. 2022. 1. 9.
로마의 국경 방위 하드리아누스 방벽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유명한 방어벽으로, 거의 300년 동안 로마 브리타니아와 칼레도니아의 야만인들을 나누는 주요 경계선 중 하나였다. 북쪽에 세워진 안토니누스 방벽을 제외하면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제국 전역에서 유일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122년에 건설을 명령하여 브리타니아의 총독 플라토리우스 네포스에 의해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126년경에 완공되었다. 방벽은 월센드(세게두눔)에서 보니스온솔웨이(또는 솔웨이 퍼스)까지 약 73 마일(80 로마 마일)에 걸쳐 있었다. 방벽은 가공할만한 수호자가 아니라 로마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기지로 계획되었다. 주로 보조군으로 구성된 로마군은 탑에 병력을 배치하여 국경을 감시하고 수비적으로 모든 대규모 적군과 싸워야 했다. 직접적인 공격이 있을 .. 2022. 1. 8.
사비니 여인 약탈 BC 89년 루키우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가 주조한 2개의 로마 공화국 데나리우스 은화. 둘 다 앞면에 사비니 왕 티투스 타티우스가 그려져 있다. 뒷면에 로마 병사에게 납치되는 사비니 여인들(위)과 사비니족에게 처벌받는 타르페이아(아래)가 그려져 있다. 사비니 여인 납치 또는 사비니 여인 유괴로도 알려진 사비니 여인 약탈(라틴어 '사비나이 랍타이')은 로마 신화에서 로마의 남자들이 지역의 다른 도시에서 젊은 여자들을 대량으로 납치한 사건이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와 르네상스 이후 시대에 화가와 조각가들의 빈번한 주제가 되었다. "약탈"이라는 단어(유사한 포르투갈어 및 다른 로맨스어에서 "랍토"는 "납치"를 의미)는 사건에 대한 고대 기록에서 사용된 라틴어 랍티오의 일반적인 번역이다. 현대 학자들은 이 단어를.. 2022. 1. 1.
제국의 리메스 제국의 국경은 천연적 또는 인공적인 방어시설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는 로마 세계를 야만인이나 외국인으로부터 구분하는 영토의 산수 장벽으로,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 강 (라인, 다뉴브, 유프라테스 등) · 산지 (다키아의 카르파티아 산맥 또는 마우레타니아의 아틀라스 산맥 등) · 사막 (이집트, 아라비아 및 시리아) 두 번째는 하드리아누스 방벽, 안토니누스 방벽, 리메스 포로리센시스, 리메스 게르마니아-라이티아의 경우와 같이 아게르(제방), 나무 울타리 또는 돌담과 해자로 구성되었다. 이 요새는 주변의 위험에 따라 다양한 거리에 감시탑과 방어탑이 있었다. 주요 리메스 첫 번째는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의 몰락을 선언한 유럽 북부 전선으로, 차례로 다음과 같이 형성되었다. - 리메스 브리타니쿠스 하드.. 2021. 12. 22.
비잔틴 제국 역사 지도 - 7편 마케도니아 왕조 (867-976년) 867-886년 바실레이오스 1세 마케돈 마케도니아인으로 불렸던 바실레이오스 1세는 마케도니아 테마의 소박한 소작농으로 태어나 제국 궁정에서 출세했다. 그는 미하일 3세의 친척인 테오필리체스를 섬겼고 부유한 다니엘리스에게서 재산을 받았다. 그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결혼하여 미하일 3세의 신임을 얻었고 866년에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다음 해에 미하일의 암살을 명령했다. 미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국정 운영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그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창시자였다. 그가 사망한 후 아들(아마도 미하일 3세의 친아들) 레온 6세가 계승했다. 867년-879년 9월 3일 콘스탄티노스 콘스탄티노스의 혈통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바실레이오스 1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또는 두 번째 부.. 2021. 11. 10.
비잔틴 제국 역사 지도 - 6편 니케포로스·아모리우 왕조 802-811년 니케포로스 1세 니케포로스 1세는 811년 플리스카 전투에서 전사했다. 즉위하기 전에는 로고테티스와 게니코스 또는 게니쿠스로 불리기도 하는 게니코스 로고테티스(재무장관)를 지냈다. 802년 비잔틴 제국. 셀레우키아 시데라 출신의 파트리키 니케포로스는 귀족들과 환관들의 도움으로 이리니를 몰아내고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발칸반도에 새로운 테마를 조직하고 국경을 강화했다. 군대 양성을 위한 제국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엄격하게 세제를 통제했다. 810년 비잔틴 제국. 니케포로스는 프랑크 왕국과 조약을 맺었지만 관계가 악화되어 806-810년 베네치아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807년 베네치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프랑크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이 분쟁은 황제가 죽은 후 해결되어 베네치.. 2021. 10. 25.
비잔틴 제국 역사 지도 - 5편 이사우로스 왕조 717-741년 레온 3세 이사우로스 레온 3세 이사우로스는 695년에서 717년 사이 비잔틴 제국에서 여러 황제가 바뀌는 거대한 불안정 기간이었던 20년간의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켰다. 그는 또한 우마이야 왕조의 침입으로부터 제국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성상 숭배를 금지했다. 716년 우마이야의 지휘관 마슬라마는 소아시아를 침공했다. 레온 3세는 그들을 속이고 진격을 늦췄다.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서 겨울을 난 아랍군은 717년 초여름 트라키아로 건너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시오스 2세 시절에 이미 도시는 강화되었고 식량이 비축되었으며 해군이 재건되었다. 함대와 합류한 아랍군은 육상과 해상 양쪽에서 도시를 포위했다. 비잔틴 함대가 그리스의 불로 아랍 함대를 공격하고 골든 혼의 입구를 사슬로.. 2021. 10. 22.
비잔틴 제국 역사 지도 - 4편 20년의 혼란 690년대 비잔틴 제국의 영토. 680년에 일어난 아랍의 내전(피트나)으로 동쪽 국경의 압박이 줄어들어 비잔틴 제국은 상대적인 평온을 누리게 되었다. 695-698년 레온티오스 레온티오스 또는 레온티우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소아시아 이사우리아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받았고 콘스탄티누스 4세 치세에 아나톨리아 테마의 스트라테고스가 되었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2세 치세 초기에 우마이야 왕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우마이야 칼리파 압드 알 말릭 이븐 마르완이 평화 조약을 맺도록 만들었다. 692년 유스티니아누스는 다시 우마이야에 전쟁을 선포하고 레온티오스를 보내 그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는 세바스토폴리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 유스티니아누.. 2021. 10. 20.
비잔틴 제국 역사 지도 - 3편 헤라클리우스 왕조 600년 비잔틴 제국. 마우리키우스가 제국을 회복하고 있었지만 포카스의 찬탈은 7세기 이슬람 세력이 발흥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610-641년 헤라클리우스 헤라클리우스의 권력 상승은 608년에 그의 아버지, 아프리카 총독 헤라클리우스가 인기 없는 찬탈자 포카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이끌었을 때 시작되었다. 헤라클리우스의 치세는 여러 번의 군사 캠페인으로 특징지어진다. 헤라클리우스가 집권한 해에, 제국은 여러 국경에서 위협을 받았다. 헤라클리우스는 즉시 602년부터 628년까지 벌어진 비잔틴-사산 전쟁을 지휘했다. 이 캠페인의 첫 번째 전투는 비잔틴의 패배로 끝났다. 페르시아 군대는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진군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은 뚫을 수 없는 성벽과 강력한 해군으로 보호되었고 헤라클리우스는 완전한 패.. 2021. 10. 14.
로마의 수입품과 수출품 어느 시대에나 인구가 많았지만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도시였던 로마는 밀을 기본으로 고기, 치즈, 오일, 채소, 와인을 비롯한 엄청난 양의 일일 식량이 필요했다. 서쪽과 동쪽의 정복은 알려지지 않은 동식물의 수입을 허용했고, 그중 일부는 이탈리아 반도에 들어와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토양은 화산이 많기 때문에 흔히 용암 토양이었고 일반적으로 채소와 과일을 더 맛있게 만드는 미네랄 소금이 풍부했다. 로마는 다음과 같은 토종 식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 루핀(로마인은 어디를 가든지 항상 루핀을 먹었다), - 렌틸콩(곡물가루를 얻기 위해), 병아리콩(곡물가루와 함께 넣어서), - 누에콩(날것과 익힌 것), - 양상추, - 양배추, - 리크, - 스펠트(폴렌타용, 따라서 밀가루라는 용어), - 서곡, - 기.. 2021. 10. 7.
비잔틴 제국 역사 지도 - 2편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518-527년 유스티누스 1세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는 농가에서 태어나 군에서 승진하여 근위대장이 되었고, 아나스타시우스 황제가 사망하자 거의 70세가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그의 통치는 그의 저명한 조카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그 뒤를 잇는 세 명의 황제를 포함하는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를 설립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 그의 부인은 에우페미아 황후였다. 그는 강한 정통적 기독교 견해로 유명했다. 이로 인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교회 사이의 아카키우스 분열이 종식되었고 유스티누스와 교황 사이의 좋은 관계를 낳았다. 치세 내내 그는 관직의 종교적 성격을 강조했고 그 당시 비정통파라고 여겨졌던 여러 기독교 단체에 대한 칙령을 통과시켰다. 외교 문제에서 그는 종교를 국가의 도구.. 2021. 10. 5.
로마의 경제 도시화(우르베) 고대 로마는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사이의 큰 불평등의 예로 받아들여지는데, 이는 종종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당시 수도는 가능성의 나라, 그 당시의 미국이었으며 도시화 현상이 압도적으로 심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살 곳이 없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박해받거나 수배된 사람들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피신했다. 조잡하게라도 거래를 아는 사람들은 로마에서 생계를 꾸렸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나열했다. 1. 국가는 무산자에게 곡물과 의무적인 돈을 기부했다. 2. 아우구스투스 이후로는 로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땅 전체에서 가장 낮은 임대료가 국가의 책임이 되었다. 한마디로 로마는 공공주택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무료로 주었는데, 이는 오늘날에는 시행되지 않으며 무료도 저렴하지도 않다. .. 2021. 10. 1.
로마 공화국 군대 (BC 500-28년) BC 500년경 공화국 수립 당시부터 전통적인 로마 군대 대형은 그리스의 호플리테스 팔랑크스를 채택했다. 로마 시민군인의 무기 또한 그리스식이었다. 짧은 창, 둥근 방패, 투구, 갑옷, 정강이받이, 그리고 칼. 유사한 대형을 사용하는 군대와 평지에서 기존 방식의 전투를 하는 경우, 팔랑크스는 충분히 잘 작동했다. 그러나 고르지 않은 지형에서는 팔랑크스가 움직일 수 없었다. BC 340-290년 삼니움과의 전쟁에서 험준한 아펜니노 고개, 계곡, 그리고 협곡에서 싸우면서 팔랑크스는 움직임이 불가능하고 기습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거친 갈리아인과의 전쟁은 기동성이 뛰어난 갈리아 군대의 편대가 팔랑크스의 노출된 측면을 보호하는 기병을 전장에서 쫓아내면 사방에서 그들을 분쇄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 2021. 9. 29.
로마와 갈리아의 만남 이탈리아 북부에 대한 켈트족의 초기 진출은 평화로웠을지 모르지만 BC 400년 이후에는 폭력적으로 변했다. 아테나이오스의 저술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연회 동안 전쟁과 습격을 촉구하는 외침이 선포되었다. "여럿이 함께 식사를 하면 그들은 동그랗게 둘러앉지만, 가장 강하고 전쟁 실력 또는 가문 관계나 재력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람은 가운데 앉았다. 그 옆에는 집주인이 있고, 그 옆에는 각 계급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길쭉한 방패를 든 전사가 뒤에 바짝 서 있고 경호원들은 맞은편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주인처럼 잔치를 즐겼다." 아마도 켈트족 의회에도 사제들인 드루이드들이 참석했을 것이다. 그들의 신조는 이 당시에도 고대로 여겨졌고 기원은 선사 켈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서로 다른 민.. 2021. 9. 28.
로마에서 유래한 300 BC 5세기 로마 시민의 무장. 청동 투구와 둥근 방패(클리페우스), 창과 짧은 검을 장비했다. 당시 군대는 이 값비싼 장비를 살 수 있는 부유한 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BC 5세기 에트루리아의 하급 장교. 호플리테스와 유사한 투구 장식의 유형으로 구별되었다. 방패는 가죽으로 강화되어 있으며 무기는 창과 팔카타 검이었다. BC 479년 또는 477년 베이엔타네스(베이와 그 일대 에트루리아인)는 파비우스 씨족을 압도하여 거의 모든 병사를 학살했다. BC 477년 크레메라 볼스키족과 아이쿠이족에 대한 전쟁에서 로마는 적절한 병력을 지원했지만, 에트루리아 도시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베이와의 전쟁에서는 동맹군으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로마에서 북쪽으로 10 마일 떨어진 바위투성이의 고지에 위치한 .. 2021.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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